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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꾸라” 이건희 회장이 남긴 어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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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꾸라” 이건희 회장이 남긴 어록은

입력
2020.10.25 10:34
수정
2020.10.25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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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삼성 회장이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에서 200여명의 임직원들에게 품질경영을 강조하고 있다. ‘신경영 선언’이라고 잘 알려진 당시 회의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유명한 어록이 나왔다. 삼성전자 제공

이건희 삼성 회장이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에서 200여명의 임직원들에게 품질경영을 강조하고 있다. ‘신경영 선언’이라고 잘 알려진 당시 회의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유명한 어록이 나왔다. 삼성전자 제공

부회장 시절 선친으로부터 ‘경청’(傾聽)이란 글귀를 선물 받은 걸 계기로 이건희 회장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철저한 ‘듣기형 리더’였다고 한다. 그런 그가 하루 최장 16시간에 달하는 임원회의를 주재하며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때가 그 유명한 1993년 ‘신경영 선언’ 때다.

당시 프랑크푸르트, 로스앤젤레스(LA), 오사카, 도쿄, 런던 등지를 돌아다니던 그에게서 나온 가장 유명한 말이 바로 ‘품질경영’으로 압축되는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였다. 이후 삼성이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이 회장은 경영철학이 담긴 메시지를 던지며 초일류기업으로의 성장을 일궜다. 현재의 문제점을 정확히 짚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그의 어록은 삼성과 한국경제 성장사와 궤를 같이 한다.

“언제까지 기술 속국이어야 합니까”

1983년 삼성이 개발한 64K D램. 삼성전자 제공

1983년 삼성이 개발한 64K D램. 삼성전자 제공

미국과 일본이 꽉 잡고 있던 반도체 시장에 진출한 건 기존 경영진과 선친의 반대를 무릅쓴 이 회장의 개인적 결단이었다. 1974년 12월 동양방송 이사였던 그가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 합니다. 사재를 보태겠습니다”라며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하면서 삼성의 반도체 역사가 시작됐다. 그는 일본, 미국의 반도체 석학들을 만나 자료를 입수했고 사업 윤곽을 잡았다. 1983년 삼성전자는 당시 세계시장 주력 제품이었던 64K D램 자체 개발에 성공했다. 일본이 6년 걸린 일을 삼성이 반도체 사업 진출 선언 후 불과 6개월 만에 해내자 전 세계는 경악했다.

1987년 삼성 반도체 사업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4M D램 개발을 앞두고 집적도(칩 위에 올라가는 소자 수)를 높이기 위해 회로를 위로 쌓을 것인가(스택 방식), 아래로 파낼 것인가(트렌치 방식)을 두고 벌어진 논쟁에서 그는 “복잡한 문제일수록 단순화해야 한다”며 “위로 쌓는 게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트렌치 방식을 택한 일본 도시바는 결국 D램 선두 주자를 삼성전자에 빼앗겼다. 1992년 삼성은 D램 반도체 시장 정상에 올랐다.

1993년 반도체 공정 새 라인을 깔 때 이 회장은 세계 표준인 6인치 웨이퍼(집적회로를 만들 때 쓰는 실리콘 판) 대신 8인치를 고집했다. “남들 따라 가다간 경제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게 이유였다. 이 회장은 그 해 6월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될 것이며, 지금처럼 잘해봐야 1.5류"라며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2017년 삼성전자는 인텔까지 제치며 세계 반도체 산업의 맹주가 됐다. 같은 해 한국 연간 수출액 5,739억달러 중 반도체 수출액이 979억4,000만달러(17%)에 달한다. ‘반도체 코리아’로 거듭난 밑바탕엔 선진국을 따라잡겠다는 집념과 부가가치가 높은 사업을 위한 과감한 투자를 결정한 이 회장의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량은 암이다”

1995년 삼성 구미사업장 운동장에서 애니콜 등 불량품 15만대를 전량 폐기하는 모습. 당시 불량제품에 불을 붙이면서 '애니콜 화형식'이라고도 불렸다. 삼성전자 제공

1995년 삼성 구미사업장 운동장에서 애니콜 등 불량품 15만대를 전량 폐기하는 모습. 당시 불량제품에 불을 붙이면서 '애니콜 화형식'이라고도 불렸다. 삼성전자 제공

‘자식과 마누라를 빼고 다 바꾸라’던 신경영 선언 때 그는 매우 화가 나 있었다. 반도체 사업 성공에 들뜰 만도 했지만 1993년 1월 미국 LA에 도착해 방문한 시내 가전제품 매장에서 그는 아무도 찾지 않는 구석에 먼지가 잔뜩 쌓인 삼성 TV를 보게 된다. 같은 해 6월에는 불량인 세탁기 뚜껑을 발견하고도 칼로 튀어나온 부분을 대충 깎아가며 조립하는 사내 방송(SBC) 고발 프로그램을 보게 된다.

충격을 받은 그는 임원진들에게 호통쳤다. “(내가) 후계자가 되고부터 모든 제품의 불량은 암이라고, 암적 존재라고 말해왔다. 암은 진화한다. 초기에 자르지 않으면 3~5년 내에 죽게 만든다. 정신들 차려.”

이후 삼성전자에서는 세탁기 생산 현장에서 불량이 나오면 즉시 라인을 멈추고 문제 해결 뒤 라인을 가동하는 ‘라인스톱제’가 생겼다.

하지만 문제는 계속 됐다. 1994년 말 삼성전자 휴대폰(애니콜) 불량률이 11.8%에 달하며 소비자 불만이 커지자 이 회장은 충격 요법을 결심한다. 1995년 3월 구미사업장에 불량 휴대폰 등 150억원 규모의 수거된 제품 15만대를 쌓고 불태워버렸다. “비싼 휴대폰, 고장 나면 누가 사겠나?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온다. 품질에 신경 써라”고 임원들을 다그쳤다.

일명 ‘애니콜 화형식’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지난 2016년 ‘갤럭시노트7 전량 리콜’ 사태와 비교되기도 한다. 배터리 발화 논란이 불거지자 삼성전자는 제품 출시 13일 만에 그 동안 생산한 250만대 전량 리콜을 결정했다. 갤럭시노트7 불량률은 0.0024%였다. 리콜 규모만 1조~1조5,000억원으로 무선사업부 영업이익의 25~30% 수준이었지만 일시적 타격을 입더라도 품질에 대한 신뢰를 끌어올리겠다는 결단이었다.

이건희 회장이 남긴 강력한 품질경영 리더십의 흔적일까. 당시 고동진 삼성전자 사장은 “가슴 아플 정도로 큰 금액이지만 소비자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내려야 할 결단”이라고 밝혔다.

“가격, 품질 거쳐 디자인 경쟁 시대 온다”

이건희 회장이 직접 개발에 관여해 '이건희폰'이라고 불린 애니콜 SGH-T100. 삼성의 첫 1,000만대 판매 휴대폰이자 노키아를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라설 수 있는 초석이 된 제품이다. 삼성전자 제공

이건희 회장이 직접 개발에 관여해 '이건희폰'이라고 불린 애니콜 SGH-T100. 삼성의 첫 1,000만대 판매 휴대폰이자 노키아를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라설 수 있는 초석이 된 제품이다. 삼성전자 제공

이 회장이 디자인에 주목하기 시작한 건 1993년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이 회장은 "앞으로 세상에선 디자인이 제일 중요해진다"며 "성능이고 질이고 이제 생산 기술이 다 비슷해지기 때문에, 앞으로 개성을 어떻게 하느냐 디자인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해진다)"고 짚었다.

1996년 이 회장은 단순히 상품의 겉모습이 아니라 기업의 철학이 담겨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21세기에는 디자인 경쟁력이 기업 경영의 승부처가 될 것이다”고 전망했다. 이에 삼성전자 내부에서는 1996년을 ‘디자인 혁명의 해’라고 불렀다.

이듬해에도 ‘디자인 예찬론’은 계속 됐다. “상품 경쟁력 요소는 기획력과 기술력, 디자인력이다. 과거엔 각 요소가 더해지는 합의 개념이어서 3가지 결정 요소 중 한 가지가 약하더라도 다른 요소의 힘이 강하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곱셈식인 요즘에는 기획력과 기술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디자인이 약하면 경쟁이 불가능하다.”(1997년 신년사)

2000년대 들어서 삼성의 디자인 역량이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2000년 당시 기준으로 사상 최대인 7조4,400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린 삼성전자는 자금을 디자인에 투자했다. 2001년엔 최고경영자(CEO) 직속으로 ‘디자인경영센터’를 둘 정도였다. 이 회장이 직접 제품 개발에 관여해 ‘이건희폰’으로 불렸던 애니콜 SGH-T100 모델이 2002년 4월 출시 후 판매량 1,000만대 돌파에 성공했다. 조약돌처럼 생긴 디자인에 세계에서 가장 먼저 컬러 액정표시장치(LCD)를 탑재해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에도 네모난 박스 형태의 디자인 일색 이었던 TV 시장에 T자형, V라인 등 새로운 디자인을 내놓으며 기존 사각형 구도를 깨는 시도를 했다. 대표적으로 2006년 출시된 TV ‘보르도’는 차기작까지 1,000만대가 팔려 소니를 제치고 삼성을 단숨에 세계 1위로 끌어올렸다. 자극 받은 샤프, 소니 등 당시 세계 선도 TV 기업들도 삼성전자 디자인을 응용하고 나섰다. 1996년 이후 삼성전자가 해외 디자인 어워드에서 받은 수상 기록만 1,000여개에 달한다.

“빌게이츠 서너명이면 국민소득 3만달러 간다”

1987년 호암아트홀에서 이건희 삼성 회장이 회장 취임식에서 그룹기를 전달받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1987년 호암아트홀에서 이건희 삼성 회장이 회장 취임식에서 그룹기를 전달받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이 회장은 누구보다 인재경영을 강조했던 인물이다. 그의 어록을 모아놓은 주요 저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 중 하나가 ‘인재’다.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10만~20만 명의 직원을 먹여 살리는 인재 경쟁의 시대다.”(2002년 6월 인재전략사장단 워크숍) “불투명한 미래를 위한 준비 경영은 설비 투자가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천재급 인재 확보다.”(2003년 6월 경영지침 발표) “글로벌 기업으로 크려면 최고의 인재를 최고의 대우를 해서 과감히 모셔와라.”(2012년 삼성중공업 사장단 오찬) 등 그는 꾸준히 인재 육성을 주창했다.

여성 인력의 중요성도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했다. 이 회장은 1997년 펴낸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생각을 보자'에서 "국가 차원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탁아소나 유치원 시설을 많이 제공함으로써 여성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따르는 경제적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며 "여자라는 이유로 채용이나 승진에서 불이익을 준다면 이에 따라 당사자가 겪게 될 좌절감은 차치하고라도 기업의 기회 손실은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2011년 8월 여성임원 오찬 자리에서는 "여성임원은 사장까지 올라 본인의 뜻과 역량을 다 펼쳐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지금도 삼성전자는 해외 인재 양성 프로그램으로 지역전문가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1990년 이 회장의 지시로 도입됐고, 외환위기 때를 제외하곤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아무 조건 없이 원하는 국가에서 1~2년 동안 머물 수 있고 연봉 외 별도로 1억원 안팎의 체제비도 지원 받는다. 글로벌 경영 학술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선 이 제도가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빠르게 성공한 핵심 비결”이라고 평가했다.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그 해 신년사에서도 이 회장은 “남보다 높은 곳에서 더 멀리 보고 새로운 기술,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냅시다. 미래를 대비하는 주역은 바로 여러분입니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1987년 회장 취임 당시에 한 “인재를 양성하고 인화(人和)와 단결로 1990년대까지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이 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의 거침없는 행보와 함께 한국 경제도 들썩였다. 1987년 한국 실질 국내총생산(GDP)는 319조원, 삼성그룹의 매출은 17조원이었다. 2016년 한국의 실질 GDP는 1,508조원으로, 삼성그룹 16개 상장사의 매출총액은 329조원으로 불어났다. 한국 실질 GDP 중 삼성그룹이 떠받친 비중은 30년 전 5%에서 21%까지 커졌다.

맹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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