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집 근처에 호수공원이 있습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호수보다는 습지에 가까운 얕고 넓은 물웅덩이들이 여러 개가 모여 있는 형태로 멀리서 얼핏 보면 모내기 직전 물이 가득 찬 논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몇몇 호수 공원들처럼 많은 돈을 들여 조경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저의 집에서는 걸어서 십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여서 가끔씩 산책이나 조깅을 하러 가기도 합니다. 그 호수에는 땅과 물의 경계선쯤에 연꽃이 심어져 있는데 제가 이사 오고 난 직후에는 조금만 보이던 연꽃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 자리를 호수 안쪽으로 넓혀가기에 연꽃을 좋아하는 저는 올해 말쯤엔 꽤 많은 연꽃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다 우기가 시작되고 연일 궂은 날씨와 비가 계속되던 언제쯤부터인가 연꽃들이 더는 자리를 넓혀가지 않고 꽃과 잎들이 시들기 시작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아무리 물을 좋아하는 연꽃이라고 해도 계속되는 비에 일조량도 부족하고 습도도 너무 높아 성장하기 힘든가 보구나… 그래도 우기가 끝나면 다시 자리를 넓혀가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기가 끝나고 해가 ‘쨍’한 날이 계속 이어졌지만 자리를 넓혀가기는커녕 시들었던 잎들과 꽃들은 그대로 말라 버리고 더는 새로운 꽃도 잎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요즘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올해의 연꽃과 잎은 그 수명을 다하고 남아 있는 뿌리들은 내년을 위해 긴 휴식에 들어갔다는 것을요.
아열대 기후인 이곳 대만은 일년 중 가장 추울 때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일이 없다 보니 모든 나무들이나 풀들이 항상 초록색을 유지하고 있어 당연히 연꽃도 일년 내내 자리를 넓혀 가며 꽃을 피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요즘은 날씨가 많이 선선해져서 밤에는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잠들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한낮에는 여전히 삼십 도를 웃도는 날씨이기에 연꽃이 성장을 멈추고 휴식에 들어갈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한 생명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수 많은 조건이 필요하건만 나는 왜 다른 조건들은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온도만 맞으면 연꽃이 계속 자리를 넓혀 가며 꽃을 피울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우기가 끝나면 계속해서 더 많은 연꽃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은 연꽃의 생태를 모르는 저의 무지에서 비롯된 '헛된 기대'였고 호수에 피어나는 연꽃을 보기 위해서는 다음 계절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 현실이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자연의 순리입니다.
사실 연꽃은 지금 당장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기에 조금 아쉽고 실망스럽긴 해도 제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만한 중요한 ‘기대’나 ‘희망’은 때론 힘든 삶을 견딜 수 있는 버팀목이 되기도 하고 불가능에 도전할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해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실망과 좌절로 끝날 수밖에 없는 헛된 기대나 희망은 때론 삶을 더 힘들고 피폐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 희망과 기대,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과 기대를 현명하게 구분할 줄 알고 또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았을 때 솔직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줄 안다면 우리들의 인생에서 실망이나 좌절로 인해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일들이 많이 줄어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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