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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 삼매경에 공주 병환도 궁궐 수비도 뒷전

입력
2020.10.24 04:3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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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쌍륙’ 놀이

편집자주

여러분처럼 조선의 왕이나 왕비도 각자 취향이 있었고 거기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사들이 그간 쉽게 접하지 못했던 왕실 인물들의 취미와 관심거리, 이를 둘러싼 역사적 비화를 <한국일보> 에 격주로 토요일에 소개합니다.


혜원 신윤복이 그린 ‘쌍륙삼매(雙六三昧)’. 탕건도 벗어 던진 채 쌍륙 삼매경에 빠져 있는 사내와 기녀의 모습이다. 국보 제135호.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혜원 신윤복이 그린 ‘쌍륙삼매(雙六三昧)’. 탕건도 벗어 던진 채 쌍륙 삼매경에 빠져 있는 사내와 기녀의 모습이다. 국보 제135호.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공주가 병이 나서 내가 사람을 보내어 문병하게 하였는데도, 너는 병증세가 어떠한지 알지도 못하고 내시를 데리고 쌍륙(雙六)만 치고 있었으니, 조금도 가장(家長) 된 도리가 없구나!”(‘세종실록’ 1424년(세종 6년) 7월 18일)

“쌍륙과 장기 놀이는 돼지를 기르는 종들이나 하는 짓이다.”(정약용의 ‘목민심서’)

1424년 세종은 21세의 꽃다운 나이에 병으로 죽은 누이 동생인 정선공주(貞善公主ㆍ1404~1424)의 남편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ㆍ?~1454)를 궐 안으로 불러 크게 꾸짖었다. 지난날 공주가 병에 들자 오빠 세종은 동생의 병세를 살피기 위해 사람을 보내어 대신 문병하게 하였는데, 정작 남편이란 자는 부인의 병증세가 어떠한지도 모르고 내시를 데리고 ‘쌍륙’만 쳤으니 가장 된 도리가 없다며 나무란 것이다.

남휘의 행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부인이 세상을 떠난 지 몇 달 지나지 않았는데도 윤자당(尹子當)의 첩 윤이(閏伊)와 간통하였고, 윤이가 사촌언니의 집으로 가버리자 질투에 눈이 멀어 그 집으로 쫓아가서 언니라는 사람과 그의 남편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구타한 일도 있었다.

부마와 같이 종실에 관련된 자는 모름지기 더욱 경계하고 근신해야 하는데 병중의 아내를 등한시하고 쌍륙에 빠져 놀 뿐만 아니라, 공주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게다가 남편이 죽은 지 100일도 안된 여인과 눈이 맞아 죄 없는 사람을 구타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사헌부에서는 남휘의 이러한 행실을 문제 삼아 벌주기를 청하였으나 세종은 관대하게 그를 용서하고 더 이상 이 문제를 언급하지 못하게 하였다. 대신 궐 안으로 남휘를 불러 그의 광패(狂悖)함을 꾸짖고 왕명이 있지 않으면 이웃이나 동네라도 출입하지 못하도록 집에 머무는 근신 처분을 내리는 데 그쳤다.

쌍륙이 도대체 얼마나 재미있고 중독성이 있는 놀이였기에 아픈 부인, 한 나라의 공주를 뒷전으로 미루고 몰두했던 것일까? 쌍륙은 윷놀이처럼 두 사람 또는 두 편으로 나뉘어 겨루는 놀이다. 주사위 두 개를 굴려 나오는 수에 따라 쌍륙판(雙六板ㆍ말판)에 놓인 말(馬)을 옮겨가며 하는 일종의 보드게임이다. 주사위 두 개를 던져 가장 큰 수인 6이 나오는 것을 일컬어 놀이의 이름을 ‘쌍륙(雙六ㆍ雙陸)’ 또는 ‘상륙(象陸)’이라 하였고, 길게 다듬은 나무나 뼈로 된 말을 쥐고 논다고 하여 ‘악삭(握?)’이라고도 불렸다.


쌍륙 놀이 도구. 쌍륙판과 15쌍의 말, 주사위 2개로 구성된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쌍륙 놀이 도구. 쌍륙판과 15쌍의 말, 주사위 2개로 구성된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게임의 룰은 쌍륙판의 각자 구역에 15개씩의 말을 배치하고 나오는 수만큼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는데, 주사위의 두 숫자를 합쳐서 한 개의 말을 움직일 수도 있고 각각의 숫자만큼 두 개의 말을 움직일 수도 있으며, 상대편의 말이 두 개 이상 있는 곳에는 말을 놓을 수 없는 등 복잡한 규칙이 있다.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상대 말을 잡아가면서 내가 가진 모든 말을 상대편보다 빨리 판에서 빼면 이기는 게임이다. 15개의 말을 적절히 움직이는 것이 승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고 판의 흐름을 파악하여 자기편에 유리한 판단을 내리는 전술이 필요하므로 게임을 하는 동안 상당히 집중해야 한다.

이와 같은 쌍륙 놀이에 빠져 궁궐 안에 불을 낸 자도 있었다. 1489년(성종 20) 12월 16일 문소전(文昭殿)을 지키는 수복(守僕) 석시(石屎) 등이 어실(御室)에 들어가서 쌍륙으로 술내기를 했는데, 서로 싸우다가 화로를 차서 지의(地衣ㆍ제사 때 쓰는 돗자리)를 불태우는 일이 발생했다. 궁궐 안에서 그것도 선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지엄한 곳에서 도박을 했으니 공주의 병중에 쌍륙에 빠졌던 남휘보다 더 간이 큰 자였던 것 같다.

불을 낸 수복노(守僕奴) 석시라는 자를 엄벌에 처하고자 하였으나 돗자리만 태우는 데 그쳤고 사람의 목숨이 무엇보다 중하니 감형하여 사형만은 면하게 하였다. 석시를 죄줄 것을 청한 내관은 쌀 등의 곡식을 포상으로 받았고, 석시의 죄를 무마해 달라는 청탁을 받아 사건을 묵인한 것이 들통난 이들은 심문을 받기에 이르는 등 쌍륙으로 인한 여파는 다른 이들의 인사 고과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 밖에도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기록을 보면 쌍륙에 대한 인식은 도박, 잡기(雜技), 방탕한 놀이 등으로 치부되는 등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1657년(효종 8년) 8월 16일 송시열(宋時烈ㆍ1607~1689)은 임금이 자주 희빈과 여러 공주들로 하여금 쌍륙과 바둑을 즐기게 하고서 놀이 값을 징수해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차린다는 것을 지적했다. 왕실에서 방탕을 즐기고 검속하지 않는 것을 염려한 것이다.

나라가 곤궁하고 재물도 바닥이 난 시기에 이러한 오락을 벌이면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리는 높아질 것이요, 뜻을 가진 선비들은 대궐에 나오려 하지 않을 것이니 이러한 잡스러운 놀이를 통렬히 끊기를 권하였다.


당나라 주방이 그린 ‘내인쌍륙도’. 궁녀들이 흑백의 말을 옮겨가며 쌍륙을 두고 있는 모습이다.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제공

당나라 주방이 그린 ‘내인쌍륙도’. 궁녀들이 흑백의 말을 옮겨가며 쌍륙을 두고 있는 모습이다.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제공


심수경(沈守慶ㆍ1516~1599) 역시 ‘견한잡록(遣閑雜錄)’에서 쌍륙을 바둑과 장기와 더불어 ‘잡기’라고 하였다. 그 기술은 각각 잘하고 못함이 있어서 승부를 겨루는 것인데 이는 소일거리로 노는 것이나 간혹 즐기다가 뜻을 상실하는 자도 있다는 것이었다. 즉 도박으로 재산을 날리는 자가 있으니 잡기는 이로움은 없고 손해만 있다고 하였다.

또한 정약용(丁若鏞ㆍ1762~1836)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는 바둑은 그래도 아취(雅趣)가 있는 것이지만 쌍륙과 장기 놀이는 ‘돼지를 기르는 종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중국 진(晉)나라 무관 도간(陶侃)이 광주자사(廣州刺史)로 있을 때의 일을 예로 들며 한 말이다. 도간은 종일 군부(軍府)의 일을 바쁘게 처리하느라 한가할 틈이 없었는데, 참모와 보좌들 중에 혹여 장난을 치면서 일을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술 그릇과 쌍륙, 장기 기구 등을 갖다가 모조리 강물에 던져 버리라 명하고 그런 일을 일삼는 이들을 매로 때렸다고 한다.

더불어 여러 가지 내기놀이 중에서 심보가 나빠지고 재산을 탕진하여 가문과 친족들의 근심이 되는 것이 첫째가 투전이며, 쌍륙과 골패가 그 다음이라고 하였다. 아전이 관전을 축내고, 장교가 장물죄를 범하는 것도 대부분 여기에서 오는 것이라며 목민관은 마땅히 엄중히 금단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쌍륙은 일하다 잠시 쉬거나 적적한 일상을 때울 수 있는 즐거운 놀이만은 아니었다. 관청의 재산까지 도박 밑천으로 사용하였던 옛 고사에 빗대어 쌍륙을 종들이나 하는 짓이라 맹렬히 비난하였던 정약용의 인식이 어떠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쌍륙 놀이에 쓰인 말과 주사위. 덕온공주의 양자 윤용구 가문의 전래품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쌍륙 놀이에 쓰인 말과 주사위. 덕온공주의 양자 윤용구 가문의 전래품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조선시대 왕실을 비롯하여 남녀노소 즐겼던 쌍륙의 기원을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서역에서 중국으로 전래된 후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 당나라 주방(周昉)이 그린 ‘내인쌍륙도(內人雙陸圖)’를 보면 궁녀들이 흑백의 말을 쌍륙판에 옮기며 즐기고 있고 또 다른 궁녀들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 같은 장면을 통해서도 중국의 궁궐 안에서 쌍륙이 여가를 위해 종종 놀이의 소재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풍속화가로 잘 알려진 신윤복, 김득신, 김준근 등의 그림 속에서도 쌍륙을 두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윤복(申潤福ㆍ 1758~?)의 ‘쌍륙삼매(雙六三昧)’ 그림을 보면 기녀와 마주 앉아 쌍륙을 하는 사내는 게임이 잘 풀리지 않는지 탕건도 벗어던진 채 긴 담뱃대를 입에 물고 쌍륙 삼매경에 빠져 있는 모습이다. 이처럼 쌍륙은 조선시대 공주와 부마를 비롯한 왕실 가족뿐 아니라 관청의 관리, 기녀들도 즐길 정도로 민가에까지 널리 퍼졌던 놀이 문화였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덕온공주(德溫公主ㆍ1822~1844) 가문에서 전래된 쌍륙 말과 주사위가 소장되어 있다. 덕온공주는 16세의 나이로 윤의선(尹宜善ㆍ1823~1887)과 혼인하였고 헌종의 왕비를 뽑는 행사에서 먹은 비빔밥이 체하여 23세의 꽃다운 나이에 사망하였다. 이 짧은 생애 동안 주사위를 굴리며 쌍륙 놀이를 즐기는 등 소소한 일상을 보내지는 않았을지 공주님의 하루를 상상해 본다.

안보라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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