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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란 태산 속 오솔길을 가는 이”... 김용섭 선생님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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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란 태산 속 오솔길을 가는 이”... 김용섭 선생님을 기리며

입력
2020.10.21 16:52
수정
2020.10.21 16:54
24면
0 0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추모 기고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한국 역사학의 태두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가 20일 별세했다. 89세.

고인은 대외활동을 극히 꺼려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로부터 영향받지 않은 학자가 없어 '한국사의 숨은 신'이라고까지 불렸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현옥씨, 아들 기중(서울대 의대 교수), 딸 소연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3일 오전 6시. 코로나19 탓에 조문은 21일 하루만 받는다. (02)2072-2011.

고인의 제자인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이 고인을 추모하는 글을 보내 왔다.


생전 김용섭(왼쪽) 연세대 명예교수와 제자인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김 이사장 제공

생전 김용섭(왼쪽) 연세대 명예교수와 제자인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김 이사장 제공


김용섭 선생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다.

선생님은 농업사를 줄기로 한국사의 체계를 세우신 분이다. 해방 후 한국 학술계의 이념과 방향을 제시해 왔다는 점에서 현대 한국의 지성계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되신 분이다.

선생님은 1931년 강원도 통천 출신으로 일찍이 역사학, 농업사 연구에 뜻을 두셨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시기의 농업사를 통해 6ㆍ25 전쟁 이후 분단 현실을 극복하고 한국사를 체계화하는 것이 목표였다.

먼저 조선 후기에 천착한 것은, 이 시기가 일제 식민사학이 한국에 대해 주장한 정체성론, 타율성론의 본보기였기 때문이었다. 양안(토지대장)을 치밀하게 분석하여 조선 후기 우리의 내적인 역량에 의해 사회가 발전, 변화하고 있었고, 그런 결과 ‘경영형 부농’이 형성됐다는 획기적인 연구였다. 이 시기 체제를 파탄으로 몰고 간 농민항쟁의 구조와 새로운 사회로 개혁하는 과정을 밝히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 결과 일제의 식민사관이 여지없이 부수어졌다. 선생님의 역사론은 흔히 ‘내재적 발전론’이라 불린다. 내적 발전 원리를 찾아가는 것이 역사학의 기본 원리이므로, 선생님께서는 그 표현을 탐탁해 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학계의 평가는 평가대로 그대로 두었다.

이후 농업사 연구를 근대 이후, 해방 후 남북 분단 시기까지 확대하여 농업 문제를 통하여 사회 개혁, 변화의 원리를 체계화하였다. 이어 중세 농업사, 마지막에 고대 농업사를 정리하여 농업사 전체를 마무리 하셨다. 아울러 농업을 통해 본 한국 통사라는 개설까지 출간하였다.

학술원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남과 북의 학술 기관, 학술 운동을 살펴보고 우리의 학술 운동이 분단 극복을 위해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도 시사하셨다. 농업사를 기반으로 한 문명사의 차원에서 한국사를 시론적으로 정리하시기도 하였다. 선생님의 학문은 대학의 정년과도 관계 없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선생님은 서울대 사범대, 문리과대, 연세대 사학과에서 줄곧 많은 후학을 양성하셨다. 그 제자들이 현재 한국 사학계를 이끌어 가고 있다. 선생님이 세운 한국사 체계가 지금의 한국 사학의 골격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왼쪽)와 제자인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김 이사장 제공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왼쪽)와 제자인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김 이사장 제공


국화꽃 속 선생님 영정이 낯설고 슬프다. 평소 당신이 좋아하시며 마련해 둔 영정이다. 2013년 요하 지역을 답사할 때 찍은 것이다. 지팡이, 목장갑, 답사 때 멘 가방…. 평소 건강이 좋진 않으셨지만, 현장을 돌아봐야 농업사를 완결할 수 있다며 모두 4차례 만주 지역을 답사하셨다. 밤마다 식탁자리에서 행하신 강연의 열정을 잊을 수 없다. 마지막 답사는 4년 전이었다. 거대한 고인돌 앞에서 술 한잔 올리던 모습에서 당신의 학문을 완결하여 조상에 대한 책무를 다했다는 기꺼움을 보았다.

빈소 영정 아래 선생님의 손때 묻은 저작집을 놓아두었다. 책마다 붙은 딱지, 메모들을 보니 새로운 서술과 보완을 구상하신 듯하다. 일체의 잡문도 사회활동도 없이, 일생 학문 연구 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으니 이제는 쉬셔야 할텐데, 저작집을 두는 것조차 죄스럽다.

선생님의 자호는 송암(松巖)이다. 역사학자는 바위처럼 굳건하게 세상의 변화에 흔들리지 말고 산속의 소나무처럼 서서 시대를 통찰해야 한다 하셨다. 역사학자의 길은 태산 속에 오솔길을 가는 것이라 하셨다. 이제는 또 다른 세상에서 바위처럼, 후배들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오솔길을 굽어보시리라.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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