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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 문을 열자, 처박힌 욕망에 날개를 달아 주자

입력
2020.10.16 22:0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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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여러 해 전, 서울 도심에 있는 어느 역사학자의 집을 방문했다. 55㎡ 남짓 땅에 3층으로 올린 노출 콘크리트 주택이었다. 신발장 위에 걸린 담채화 한 점이 인상적인 현관에 들어설 때부터 집주인의 품성이 고스란히 엿보였다. 실제 크기보다 두 배쯤 넓어 보이는 거실도 마찬가지였다. 소파 대신 등받이 달린 방석 세 개와 다탁이 놓인 거실에는 그 흔한 텔레비전이나 책장조차 없었다. 미니정원으로 이어지는 통창 가에 나란히 선 몇 개의 화분에는 고추와 방울토마토, 가지가 여름 햇빛을 받으며 왕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날 그 집을 구경하면서 내가 열렬하게 매료된 곳은 따로 있었다. 옷장이었다. 방마다 붙박이로 짜 넣은 옷장들을 여는 순간 나는 큰 숨을 들이쉬었다. 50대 집주인부터 20대 아들과 10대 딸의 옷장까지, 잘 정리된 옷장 안의 모습은 흡사 여행자의 그것처럼 단출했다. ‘아, 이게 맞는 거구나!’ 순간적인 깨달음이 찾아왔다.

집에 오자마자 내 옷장 정리를 시작했다. 다른 여성들에 비해 옷 욕심이 심하게 적다고 여겼는데, 막상 분류에 들어가니 70%가량이 의류수거함에 보내질 운명이었다. 남은 옷가지를 수납하고도 옷장 두 칸이 텅텅 빈 모습을 보자니 속이 후련했다. 그런데 의류수거함에 구겨 넣은 옷들이 눈에 밟혔다. 그 애들의 다음 행선지는 어디일까? 더 나은 길은 없을까?

이런 의문을 명쾌하게 풀기 위해 공부하다가 발견한 사람이 크리스티나 딘이라는 멋진 여성이었다. 본래 잘 나가는 과학자였던 그는 어느 날 세계적으로 가장 끔찍한 오염산업인 의류산업의 실체와 맞닥뜨렸다. 패션 감각 넘치는 셀럽으로도 인기를 끌던 딘은 불편한 진실에 눈감는 대신 두 팔 걷어붙였다. 난수표처럼 복잡하게 얽힌 의류업의 속내를 파헤칠수록 역겨운 냄새가 진동했고, 그는 아예 자신의 인생행로를 틀기로 마음먹었다. 면화 재배부터 한 장의 티셔츠가 완성되기까지, 우리가 옷을 사는 순간부터 입고 빨고 처박아 두고 마침내 버려지는 그 순간까지, 각 단계에서 발생하는 환경오염과 낭비를 줄이고 소비자에게 새로운 패션 윤리를 제시하자는 모토 아래 ‘리드레스’라는 NGO도 만들었다. 조금만 더 젊고 똑똑했더라면 나도 좀 끼워 달라고 통사정했을 텐데…. 그가 쓴 책을 읽고, 정기적으로 보내주는 레터를 10년쯤 구독하다 보니 옷 문제에 관한 한 친구들에게 훈수를 둘 만한 전문성이 생겼다. 무차별로 쏟아지는 옷 광고에 휘둘려 과소비로 내몰리는 지인들을 주저앉히며 적절한 솔루션을 제시할 때면 은근한 쾌감도 느꼈다.

그리고 엊그제, 가장 난망하다고 여겨온 사람을 이 길로 끌어들였다. 엄마다. “지난번 네 아버지 입원했을 때 병원에 가져갈 가을옷을 찾다 보니 울적해지더라. 전부 추억이 있는 옷들인데, 산더미처럼 쌓인 이 옷들을 태워버릴 수도 없고.” 모처럼 열린 빈틈을 잽싸게 치고 들어갔다. “그 소중한 걸 왜 태워? 주말에 옷장 정리해요. 진짜로 입을 옷들만 남기고 깨끗하게 빨아서 필요한 단체에 기부해요.” 흐흐. ‘소중한 옷을 기부’하자는 나의 영리한 단어 선택이 물건을 좀체 버리지 못하는 엄마를 홀렸다. 어림잡아도 50㎏은 될 재활용 의류 중 몇 개는 살짝 손보면 올겨울 내가 입을 만한 코트로 재탄생할 것이다. 이래저래 개선장군이 될 기분으로 나는 고향 집에 간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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