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선언, 지금은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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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선언, 지금은 때가 아니다

입력
2020.10.15 18:00
수정
2020.10.15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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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
이준희한국일보 고문


북 핵무력 완성에 위중한 국제정세
거듭된 도발, 농락에도 무감한 한국
종전 이벤트보다 전략적 숙려 필요

(좌)북한은 노동신문에 '조선노동당 창건 75주년 경축 열병식'에서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공개했다고 보도했다. (사진=노동신문 캡처) (우) 문재인 대통령은 제75차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종전선언을 제안했다.(사진=청와대 제공)


신형 다탄두 ICBM과 SLBM은 북한 핵무력의 완성판이다. 모든 전략 목표를 커버하는 사거리, 속도, 은밀성, 다목표 동시 타격 능력으로 현존 어떤 방어체계로도 여의치 않은 괴물이다. 2017년 첫 ICBM을 발사했을 때도 기술력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으나 겨우 3년 만의 괄목 진전으로 ‘진품’ 논란은 더 이상 의미 없어졌다.

남아공, 리비아처럼 개발 과정에서 접은 일은 있어도 장거리 투발 능력까지 완성하고도 핵을 포기하는 경우는 없다. 정치용어인 CVID 대신 현실 방안이던 핵동결 따위는 무의미해졌다. 동결해도 북한은 완전한 핵무력을 보존한 채로 상황을 관리할 수 있게 됐다. 이번 무기들은 북핵을 다루는 방식에 근본적 변화를 초래할 게임체인저다. 우리는 제대로 멱살을 쥐어 잡혔다.

우리가 북한에 꽤 너그러울 수 있던 바탕은 GDP 50배에 달하는 압도적 국력이다. 한데 국력이 경제력만은 아니다. 기습단기전 능력에 핵을 더하면 북 군사력이 우리의 2배 이상이란 분석도 나왔다. “남한 군대는 상대도 안 된다”는 게 김정은의 허세만은 아니다. 북한이 제재숨통을 트이게 되면 경제 격차도 빠르게 줄 것이다. 체제 경쟁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이런데도 우린 무감하다. 오히려 김정은의 “사랑하는 남녘 동포들”에 무너지고 대화 언질에 좋아라할 뿐이다. ‘역겨운 처신머리, 꼴불견, 저능, 겁먹은 개’ 등의 쌍욕을 연일 퍼먹던 때도, 연락사무소 폭파에 우리 국민 피살 때도 그랬다. “군사행동 보류” 한 마디나 친서 한 통마다 집권 진영은 “남북관계에 새로운 물꼬”라며 감읍했다.

이런 일이 올해에만 다섯 번이다. 이토록 자주 물꼬가 트였으면 남북 간에 화합·평화가 강처럼 흘러 홍수가 날 지경이어야 했다. 이 정도로 농락당하면서도 모르면 김여정의 폭언대로 저능이고, 알고도 모른 체하면 그게 겁먹은 개다. 양보나 이해는 강자의 용어다. 엇비슷하거나 열위에서의 양보 인내는 굴종이다.

이런 판국에 종전선언은 어불성설이다. 어떤 선언도 현실을 규율하지 못한다. 7·4공동성명 이래 네 차례 정상회담 등을 포함한 숱한 남북 간 합의, 성명, 선언들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도 우리가 우위일 때는 종전이 평화체제로 가는 관문이 될 수도 있었다. 북한의 불안감을 눅여 정상 국제체제로 끌어들이는 시도로 쓸 만했다.

그러나 북한이 핵무력을 완성한 이 상황에선 아니다. 종전선언의 득은 북에만 있다. UN 개입과 한미동맹이 골간인 정전체제를 해체함으로써 다중 방위체제가 명분을 잃는 효과만 두드러진다. 우리도 같이 핵을 쥐지 않는 한 재래식 군사력만으로의 독자안보는 망상이다. 이러면 우리 운명을 북한의 선의에 맡기는 셈이 된다. 더욱이 미 대선 이후의 미중, 북미, 남북관계는 새로운 형태로 맞물려 돌아가면서 다시 예측불허의 상황으로 치달을 것이다.

북한은 지금껏 그랬듯 변할 여지가 없다는 게 거듭 확인된 현실이다. 남북관계에서 낭만적 상상력은 금물이란 건 수십 년 경험칙이다. 종전선언 정도로 북의 변화를 유인할 가능성은 적되 감당해야 할 현실적 리스크는 크다. 도박을 하려는 게 아닌 이상 선택은 자명하다.

북핵 해법은 사실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다만 칼날 같은 상황에 선 지금만큼은 당분간 주변 상황을 살피면서 북한이 판단을 바꿀 틈새를 정밀하게 찾아내는 전략적 숙려기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선 스스로의 힘을 빼는 어떤 사소한 진행도 경계해야 한다. 도리어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한 다자안보 체계를 다지는 것이 검증된 당장의 안전판이다.

지금은 종전선언 같은 실익 없고 위험한 이벤트에 눈 돌릴 때가 아니다.



이준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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