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살아있다. 영화 '#살아있다'를 보면 유대가 끊긴 사람들의 절절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노인 외출 자제를 외치는 정부의 호소에 ‘집콕’ 중인 내 모습과도 묘한 동질감이 느껴진다. 날이 따뜻해지면 잦아들까 했지만 계절이 세 번이나 바뀌었는데도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내년에도 학교의 문이 굳게 닫혀 있게 된다면, 앞으로도 학교가 필요할까? 기업들은 언제까지 재택으로 버틸 수 있을까? 언제까지 멈춰버린 세상에서 사는 삶을 강요받아야 할까? 하는 생각과 함께 마치 자유를 잃은 듯한 기분마저 든다. 길에서 오가며 마주치는 모든 이들을 바이러스 보균자로 간주하고 경계하는 지금의 삶은 흡사 좀비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코로나 공포 속에 살아가야 할 날들이 암담하다. 과연 이것이 '살아있는' 삶일까?
우리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웰 다잉(Well-Dying)’을 이야기하지만 ‘웰 빙(Well-being)’이 품위 있고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 중요한 가치라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봉쇄와 통제가 정답은 아니다.
전염병이 전 지구적 팬데믹으로 확장되는 속에서 우리가 보여준 방역은 분명 자랑할 만하나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다. 8개월 넘게 흡사 전시 체제로 굴러가는 의료진과 방역당국 공무원의 삶은 한계까지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 삶 역시 위태롭기는 마찬가지다. 등교 못하는 아이들과 발 묶인 학부모, 텅 빈 가게를 꾸역꾸역 지키는 상인, 평범한 내 이웃. 모두가 비명을 지르고 있다. 무엇보다 항상 얼굴을 가린 채 가까운 이들과 마음껏 대화할 수 없고, 주변에 확진자가 발생하지는 않았나 하는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국민 전체의 심리적 방역선이 무너지고 있다는 점은 무엇보다 큰 걱정거리다.
물샐 틈 없는 촘촘한 방역의 효용성은 이미 충분히 입증이 되었다. 이제는 방역과 일상의 균형점이 어디인가 하는 고민이 필요하다. 방역의 단계를 높이면 바이러스는 더 잘 잡아내겠지만 그만큼 국민의 일상과 심리적 회복탄력성은 더 떨어지게 마련이다. 우리 대응력의 한계(불분명한 감염경로, 병실 수, 의료진의 피로)를 무시한 채 언제까지 버티기는 어렵다.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면 이 기나긴 사투도 다 지난 일이 되겠지만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때까지 100m 달리기 하듯 국민의 삶을 옥죌 수만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삶에 숨쉴 공간을 만들어줄 변화의 탄력성이 필수다. 방역이 꼭 필요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 막아야 할 때와 풀어야 할 때를 구분할 수 있는 지혜와 데이터가 쌓였다. 바이러스와 싸우면서도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자영업자들은 장사를 하고 모두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적절한 지침과 행동요령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도 코로나는 장기전이 될 것이라고 했고 트럼프 대통령도 앓아 봤다. 지금까지 두려움에 기반한 정책으로 초기 대응에 성공했다면 이제부터는 일상에 늘 존재하는 상수라는 전제 하에 멋지게 관리하는 방역정책으로의 전환을 꾀할 때다. 코로나 스트레스도 코로나 감옥 생활도 이제 지쳤다. 자유로운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 이제 공포를 원동력으로 삼아 바이러스와 일상의 공존이라는 콜럼버스의 과제에 도전해보자. K방역의 미래는 품위 있는 ‘삶’을 위해 사회적 합의를 거쳐 묘안을 마련하는 길이고 이것이 바로 K방역의 완성이다. 우울한 추석 연휴였다. 내년 추석도 이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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