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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를 '쓰레기 열사'로 만들었나

입력
2020.11.01 08:00
수정
2020.11.02 10:03
0 0

전국서 불법 폐기물 투기범 쫓는 서봉태씨 인터뷰
"공장 빌려줬더니 쓰레기와 빚더미만 돌아와"
"현장 잡으려 주말에도 잠복…힘들지 않아"

지난달 12일 오후 한국일보 본사에서 서봉태씨가 경북 영천에 있는 불법 폐기물의 실태를 얘기하고 있다. 왕나경 인턴기자

지난달 12일 오후 한국일보 본사에서 서봉태씨가 경북 영천에 있는 불법 폐기물의 실태를 얘기하고 있다. 왕나경 인턴기자

"이제는 스쳐지나가는 화물차만 봐도 불법 폐기물을 몰래 실었는지 한눈에 알아볼 정도에요."

여기 쓰레기를 쫓아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매일 4시간 쪽잠을 자고 주말은 통째로 반납하면서까지 전국의 공장을 샅샅이 살피는 이 사람. 조금 수상하기까지 하는데요. 왜 이러는 걸까요? 불법 폐기물 투기 현장을 잡아내기 위해 전국 곳곳을 다니는 서봉태(51)씨 이야기입니다.

"지난해 초까지 폐기물의 '폐'자도 몰랐다"는 서씨는 현재 전국을 누비며 불법 폐기물 투기 현장을 찾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하다 화물차에 불법 폐기물이 담긴 것으로 의심되면 반사적으로 따라갑니다. 차에 실려 있는 물건의 정체를 확인하거나 현장에 보관된 물건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잠복도 수시로 합니다.

지난달 12일 한국일보 사무실에서 서씨를 만나 불법 폐기물과 전쟁을 직접 들어봤습니다.

점 조직 형태로 꽁꽁 숨어 있는 폐기물 투기 조직

서봉태씨가 지난달 12일 한국일보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이 파악한 경북 영천의 불법 폐기물 범죄단 조직도를 설명하고 있다. 왕나경 인턴기자

서봉태씨가 지난달 12일 한국일보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이 파악한 경북 영천의 불법 폐기물 범죄단 조직도를 설명하고 있다. 왕나경 인턴기자



2020년 10월 현재 서씨에 따르면 자신이 찾아 낸 불법 폐기물 현장은 22곳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 결과 기소된 투기범만 200명이 넘는다네요. 기자와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두꺼운 서류 뭉치를 꺼낸 서씨.

직접 만든 '불법 폐기물 범죄단 조직도'에서부터 '폐기물 투기 과정 조직도', 지난해 5월 28일부터 지금까지 진행한 '폐기물 적발 현황'까지. 심지어 적발 과정에서 만난 범인들의 상호명ㆍ이름ㆍ주민등록번호ㆍ쓰레기 불법 반출 내역을 인정한 내용 등이 담긴 '사실확인서'는 물론, 서씨가 파악한 관련 공무원들의 애로 사항을 적은 메모까지 있습니다.

서씨가 파악한 사실은 이렇습니다. 피해자 A가 B에게 공장을 임대해주면 B가 공장 시설을 가동하는 대신 몰래 A의 공장에 쓰레기를 갖다 버립니다. 간단한 구조로 보이는데요.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감안하면 실제 훨씬 복잡합니다.

B는 A와 직접 계약을 맺고 공장을 빌린 '바지' 업체일뿐, 실제로는 쓰레기를 배출하는 C와 이를 불법 투기 장소로 수집ㆍ운반하는 D, C와 D를 중개해주는 E,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진두지휘하는 총책 F까지.

이렇게 싸게 처리해 주겠다며 받아온 쓰레기들을 빈 공장에 몰래 버리는 '조직적 투기'는 전국적으로 횡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공장을 빌려준 주인들이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경우에는 공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체크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투기 조직이 '걱정 없이' 마구 버리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좋은 마음에서 공장이나 창고를 빌려줬다가 봉변을 당하는 선의의 피해자가 전국적으로 나오고 있으니 서씨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법도 한 것이죠.

"보통 경기도에서 폐기물이 많이 나오고 대구 달성군이 중간 기착지더라고요. 이 모든 걸 배후에서 조종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인물들은 다름아닌 경북 의성 쓰레기산사건 관련 인물들입니다." '의성 쓰레기산'은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의 한 폐기물 처리장에 17만3,000여톤의 폐기물이 쌓인 문제로, 지난해 3월 미국 CNN에 방송돼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4월 "반드시 올해 안에 불법 폐기물 처리를 마무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서씨에 따르면 운송업체부터 쓰레기 처리업체 등까지 이어지는 기업형 불법 투기 사범들은 대부분 조직 폭력배 출신들이라고 합니다. 온몸에 문신을 자랑하는가 하면 신고하겠다고 강하게 나오는 서씨에게도 자신의 '출신'을 내세우며 협박을 일삼기도 하죠.

가장 최근인 7월 24일에는 대구지법 형사3단독(재판장 김형태)이 경북 칠곡군의 1만2,561㎡ 가량의 공장 창고를 빌린 후 쓰레기 4,100톤을 무더기로 방치한 혐의로 기소된 G씨에게 징역 3년과 벌금 3,000만원을 선고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잠깐, 이 모든 걸 민간인인 서씨가 혼자서 다 했다고요?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폐기물을 버리려면 관계 기관으로부터 인허가를 받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폐기물 처리 시설도 갖춰야 하죠.

투기범들은 이런 것들이 없으니 제3자인 서씨가 "신고하겠다"며 설득할 수 있었던 겁니다. 투기범들 입장에서는 주범으로 몰릴 바에는 누구 지시를 받고 했는지를 서씨에 알리는 게 현명한 선택이겠죠? 그래서 서씨는 '누가 이 일에 연루됐다'는 내용이 담긴 사실 확인서를 받을 수 있었던 거에요.

공장 빌려줬더니 몰래 폐기물 투기, 피해자는 부도 위기

지난해 8월 9일 서봉태씨가 직접 찾아낸 경북 영천시의 한 폐기물 투기장. 서봉태씨 제공

지난해 8월 9일 서봉태씨가 직접 찾아낸 경북 영천시의 한 폐기물 투기장. 서봉태씨 제공

서씨는 어쩌다가 '쓰레기 열사'가 된 걸까요. 시작은 수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원래 서씨는 개발업자로, 쓰레기ㆍ폐기물ㆍ환경과는 거리가 멀었죠. 환경단체에서 쓰레기를 줍는 봉사활동만 간간히 하던 정도였죠.

그러던 중 2015년 A씨와 경북 영천시에 있는 본인 소유의 땅 42,975㎡(1만3,000평) 중 4,958㎡(1,500평)을 매매 계약합니다. A씨는 그 곳에 약 1,652㎡(500평)짜리 공장을 짓습니다. 이후 2018년 12월 20일, B사가 A씨의 공장에 "고철과 비철 등을 보관하겠다"며 "시세보다 30% 비싸게 세를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엿새 후부터 폐기물이 버려지기 시작했죠. 하지만 외지인인 A씨가 이를 알리가 없었습니다.

대신 서씨가 다섯달이 지난 2019년 5월 24일 우연히 공장 앞마당에 건축 폐기물ㆍ타이어 등이 쌓여있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오후 1시쯤 인근 공장에 업무를 보러갔다가 건물이 파손돼 있는 것을 본 서씨는 이상한 느낌에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대문이 닫혀 있던 까닭에 옆 공장의 벽을 넘어 공장 마당으로 가보니 건물 출입구도 굳게 잠겨있었습니다. 문을 따고 들어가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쓰레기 더미만 쌓여 있던 겁니다.

대체 누가 이런 걸까요. 당시 현장에 있던 지게차를 보고 힌트를 얻은 서씨는 인근의 지게차 임대 업소를 찾아다녔습니다. 결국 경북 포항에서 지게차를 빌려준 사람을 만난 서씨는 그들을 통해 폐기물 처리를 맡긴 업체 대표ㆍ폐기물을 옮긴 물류업체 대표를 찾았죠. 결국 보름 만에 이 모든 이익을 챙긴 총책과 마주쳤습니다.

지난해 7월이었습니다. 팔 전체에 문신을 새긴 그는 쓰레기 얘기를 하려는 서씨를 향해 "나는 조직 생활하던 사람인데"라며 시치미를 떼며 딴소리만 늘어놓았습니다. 이에 서씨는 "그러면 건강하게 생활하시지, 왜 쓰레기를 버리시냐"며 오히려 그를 도발했다고 합니다. 살벌한 기싸움의 현장이었죠.

서씨가 '쓰레기 열사'로 변모하게 된 건 이때부터입니다. 서씨의 땅에 공장을 세웠던 A씨는 서씨로부터 공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듣고 크게 당황했다고 해요. 하루 아침에 9,000톤에 달하는 폐기물 때문에 행정대집행으로 인한 40억원을 물어야 해서 부도 위기에 처해졌는데, 정작 이 범인들은 '나 몰라라'는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현장을 찾아다닐 때마다 전직 조직 폭력배들까지 마주해야 했던 서씨. 하지만 온몸을 문신으로 채운 이들의 협박도 서씨를 흔들 수는 없었습니다. 서씨는 "오히려 현장에서 봤던 투기범들의 고급 수입차를 보고 화만 더 났다"고 회상했습니다.

조폭 협박 전화에 가족과 '생이별'도 감수

서봉태씨가 지난해 7월 21일 찾아간 경북 성주군 불법 폐기물 매립 현장. 서봉태씨 제공

서봉태씨가 지난해 7월 21일 찾아간 경북 성주군 불법 폐기물 매립 현장. 서봉태씨 제공

돈 벌이가 되지도 않는 이 활동. '어쩌다 환경운동가'가 된 서씨에게 이 일을 그만두고 싶지 않냐고 물어봤습니다.

"하루는 불법 폐기물 업자들이 500만원을 주더라고요. 전국을 다니다보니 법망을 피하면서 쓰레기 투기로 큰 돈을 벌 수 있는 꼼수까지 알게 됐습니다. 그 돈 받아서 뭐합니까. 밥만 먹으면 되지, 딴 게 뭐가 필요합니까."

조직 폭력배들까지 마주하다보니 종종 위험한 일까지 생기기도 한다는데요. 어느 날은 서씨에게 '발신번호 표시제한'으로 가족들 안부를 묻는 협박 전화가 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현재 서씨는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동차도 여러 대 둬 바꿔타고 다니고, 가족과 따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서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사업체도 직원들에게 맡기고 투기 조직 쫓기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보통 정의감과 사명이 아닌 것 같죠?


환경부 장관 앞에서 "폐기물 투기 담당 공무원 부족 심각"

7월 11일 충북 진천군에서 서봉태씨가 폐기물 운반 현장을 촬영한 사진. 서봉태씨 제공

7월 11일 충북 진천군에서 서봉태씨가 폐기물 운반 현장을 촬영한 사진. 서봉태씨 제공

그러면 민간인 한 명이 이렇게 전국을 쏘다니며 불법 폐기물 투기 조직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환경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요.

서씨가 현장을 다니면서 느낀 공무원들의 어려움은 이렇습니다. 폐기물 투기와 관련된 사람들은 조직적으로 운영되는 반면 군 단위 지자체의 경우 현장을 관리할 공무원 인력은 턱없이 부족한 것이죠. 실제로 투기 현장에 찾아갔던 젊은 공무원들은 공장 문을 걸어 잠그고 옷을 벗는 등 조직 폭력배들의 간접 협박에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고 하네요.

지난해 여름에는 남자 공무원 한 명이 늦은 밤 서씨에 전화를 걸어 "공무원이 아니라 국민으로서 부탁한다. 제발 저 (불법 투기) 업체 좀 없애달라"면서 울먹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공무원 몇명이 대응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인력 부족이라는 근본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이에 서씨는 지난달 참고인 신분으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까지 출석, 불법 폐기물 투기 실태와 투기범을 붙잡는 과정을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서씨는 조명래 환경부 장관에게 "장관의 공장이라면 불법 폐기물이 1년 동안 방치되었을까 의문이 든다"라며 일침을 날리기까지 했죠.

강은미 정의당 의원도 "전국 폐기물 처리를 위한 이동과 반출량을 신고하는 환경부 산하 한국환경공단의 '올바로시스템'이 2002년부터 18년 동안 운영됐지만 불법 폐기물이 어떻게 처리됐는지 전혀 알 수 없다"고 꼬집었습니다. 올바로시스템은 폐기물의 배출에서부터 운반ㆍ최종처리까지 전 과정을 종합관리하는 폐기물관리시스템입니다. 강 의원은 이어 "최근 운송업체들이 일반 카고, 윙바디 차량 등 알선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폐기물을 운반하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오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서씨도 "각 지자체들이 등록된 쓰레기 처리 여부를 일일이 검사하지 않는 허점을 노렸다"며 "이런 상황에서 올바로시스템은 무용지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폐기물 전문가' 돼버려…"전문 시민단체 만들 예정"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택배,음식 배송 서비스 이용 증가와 '언택트 추석'이 활성화 되면서 포장재 쓰레기 배출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달 5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수원시 자원순환센터 야적장에 각 가정에서 수거한 일회용 플라스틱 쓰레기가 수북히 쌓여 있다. 뉴시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택배,음식 배송 서비스 이용 증가와 '언택트 추석'이 활성화 되면서 포장재 쓰레기 배출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달 5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수원시 자원순환센터 야적장에 각 가정에서 수거한 일회용 플라스틱 쓰레기가 수북히 쌓여 있다. 뉴시스

쓰레기 열사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서씨는 "이 활동하면서 1년 반 동안 제 돈 7,000~8,000만원을 썼다"며 "포크레인 등 장비에다 쓰레기를 뒤지는 인력을 고용해서 돌아다녔다"고 말했습니다.

서씨는 자신이 어느덧 불법 폐기물 전문가가 됐다며 씁쓸해 했습니다. 그는 "이제는 화물 관련된 업체에서 불법 폐기물 운송업체 등 갖가지 제보까지 옵니다. 저도 현장 여러 군데 다니면서 폐광재(광물을 캐내는 일이 중지된 광산에서 나온 쓰레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어떻게 생겼는지까지 다 알게됐죠. 전문가가 돼버렸습니다. 이제는 이런 불법 폐기물 문제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시민단체를 내년에 만들 예정입니다."

서씨는 후원이 들어와도 받지 않겠다고 공언했습니다. 후원을 통해 본인의 고발 활동을 막거나 방해하려는 업자들이 있기 때문이죠.

보통 환경운동하면 처음부터 지구와 자연을 지킬 목적으로 시작할 것 같은데, 서씨는 조금 다른 케이스입니다. 환경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던 중 거대한 쓰레기 투기 범죄 구조를 알게 되면서 삶 전부를 이곳에 내던지고 있습니다.

'어쩌다 쓰레기 전문가'가 된 서봉태씨. 그의 바람대로 대한민국에 불법 폐기물이 사라지는 그날이 하루빨리 오길 바라봅니다.

손성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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