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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 통일부 차관 "혼란ㆍ역동, 때론 여백...남북관계 닮은 서예에 매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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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 통일부 차관 "혼란ㆍ역동, 때론 여백...남북관계 닮은 서예에 매료"

입력
2020.10.16 18:20
수정
2020.10.16 19:39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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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 평양공동선언' 2주년 기념 서예전 열어?
"남북관계 고비마다 서예로 원칙 되새겨"


서호 통일부 차관이 지난 12일 정부서울청사 집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뒤로 서 차관이 직접 쓴 '인무원려 난성대업'(人無遠慮 難成大業) 글씨가 보인다.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쓴 글로 '멀리 앞을 보지 못하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렵다'는 뜻이다. 홍인기 기자

서호 통일부 차관이 지난 12일 정부서울청사 집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뒤로 서 차관이 직접 쓴 '인무원려 난성대업'(人無遠慮 難成大業) 글씨가 보인다.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쓴 글로 '멀리 앞을 보지 못하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렵다'는 뜻이다. 홍인기 기자


'미병성재 고금상책(?兵省財古今上策)'. 전쟁을 막고 재물을 쌓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가장 좋은 대책이란 뜻이다.

지난 6월 북한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일방적으로 폭파하며 대남 공세를 펼치던 무렵 서호(60) 통일부 차관 겸 남북공동연락사무소장은 화선지 위에 이 글귀를 써 내려갔다. 남북간 험악한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남북이 전쟁을 피하고 공동 번영을 누려야 한다는 원칙을 다시금 되새기기 위해서였다.

지난 12일 정부서울청사 집무실에서 만난 서 차관은 "남북이 합작해서 만든 연락사무소를 북측 마음대로 폭파하는 건 절대 있어선 안될 일"이라며 "남북관계가 바닥에 닿았다고 느꼈는데,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기 위해 붓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지난 2년간 청와대 통일비서관과 통일부 차관을 맡으며 격랑의 남북 관계를 헤쳐가면서 써내려간 붓 글씨는 30여점. 남북관계의 원칙을 되새기고 남북 공동 번영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은 그의 서예 작품이 15일부터 29일까지 경기도 파주 평화순례자갤러리에서 '남북동심(南北同心): 평화와 공동번영의 한반도'라는 주제로 전시된다.

어릴 때 간간히 붓글씨를 배웠다는 서 차관은 남북 관계의 한 복판에 서면서 더욱 서예에 매료됐다고 한다. 하얀 화선지 위에서 먹물을 머금은 글씨가 남북 관계와 닮았다는 점에서다. 화선지에 흩뿌려진 먹물 방울처럼 남북 관계 역시 혼란스럽기도 하고 흐릿하게 번진 글씨마냥 미래를 점치기 어려울 때도 있다. 하지만 힘 있는 필획처럼 역동적이고 강렬한 순간을 맞는가 하면 빈 공간으로 남겨둬야 하는 여백의 순간도 있다. 1985년 통일부에 입부해 35년간 공직생활을 하면서 남북관계를 푸는 '플레이어'(player)로 뛰면서 깨달은 점이다.

굴곡진 남북관계의 해법을 고민하며 서 차관이 적어 내린 글귀는 '남북동심기리단금'(南北同心其利斷金)이다. '이인동심기리단금'(二人同心其利斷金ㆍ두 사람이 합심하면 그 날카로움이 단단한 쇠도 끊을 수 있다)이라는 주역의 구절에서 '이인'을 '남북'으로 바꿔 적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붓을 잡으면 평온해진다는데, 이 작품의 글씨는 유독 단단하다. 서 차관은 "남북관계의 기본은 협상"이라며 "성공적인 협상은 상대를 굴복시키는 게 아니라 상대를 협상장으로 이끄는 것이고, 남북이 거리를 좁혀 대화하면 단단한 쇠처럼 묶인 한반도의 운명을 바꿀 수 있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실제 서 차관은 200여 차례의 남북 간 크고 작은 회담에 참여하면서 협상의 중요성을 체감했다. 2013년 북한이 3차 핵실험을 단행하고 개성공단의 근로자를 일방 철수시킬 당시 1차 실무회담 수석대표였던 서 차관이 북측을 설득해 남측 기업의 손해를 줄인 것도 '작은 협상'의 성과다.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이 갑자기 운영을 중단해 완성된 제품도 싣고 나오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를 때 북측에 '역지사지'(易地思之)를 강조했다고 한다. 개성공단 재개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텐데, 기업이 망하면 재입주가 어렵다고 설득하자 북측도 수긍했다.

남북 간 협상은 한발 전진하면 반보 후퇴하고, 한발 물러나면 다시 반보 전진하는 과정을 거듭하고 있다. 2018년 9월19일 평양에서 남북 정상이 만나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를 만들자며 '평양공동선언'을 약속했지만 현재까지 남북은 마주보지 않고 있다.

최근의 남북관계는 화선지 위의 여백과 닮았다. 북한이 6월 남북 연락사무소 폭파와 함께 남북 간 모든 연락 채널을 차단했지만, 대화 재개의 가능성은 여전히 살아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연설에서 "사랑하는 남녘 동포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보낸다"며 유화 메시지를 보냈다. "김 위원장이 남북 간 합의 이행 등 행동 의지를 표명하진 않았지만, 봄이 오면 남북 관계도 훈풍이 불지 않겠느냐는 기대를 줬다"는 게 서 차관의 평가다.



김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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