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가르쳐 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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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이 가르쳐 주는 것

입력
2020.10.13 16:30
수정
2020.10.13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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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이정모국립과천과학관장

설악산 단풍. 한국일보 자료사진


잔더 아주머니는 간호사로 독일에 와서 독일 남자와 결혼했는데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자기 조카를 양녀로 입양하여 독일에서 유학시켰고, 한국 유학생들을 자주 집으로 초대했다. 어느 날 한국에 다녀온 남편이 우리를 초대해서 이런저런 자랑을 했다. 한국에서 뭐가 가장 좋았냐고 물었더니 “독일이나 한국이나 별로 다를 게 없어. 그런데 독일에서는 볼 수 없는 놀라운 걸 설악산에 가서 봤지. 바로 단풍이야!”

나는 겉으로는 동감하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헐~’이란 반응을 했다. 독일 단풍도 한국과 똑같다. 그러면서 고등학교 때 좋아하던 시험 문제가 하나 떠올랐다.

‘다음 괄호에 들어갈 말은 뭘까? b–a-( )-카로틴’ 고등학교 때 생물 과목을 좋아했다면 크산토필이라고 쉽게 답할 수 있다. 시금치를 으깨서 나온 초록색 물로 거름종이에 점을 찍고 종이 크로마토그래피 실험을 하면 네 개의 점으로 분리된다. 각각의 정체는 색소다. 아래부터 엽록소b-엽록소a–크산토필–카로틴이다. 우리는 이 실험을 거름종이가 아니라 초록색 칠판 위에다 했다. 두 가지 엽록소는 흰 분필로 점을 찍었지만 크산토필과 카로틴은 각각 노란색과 분홍색 분필로 그렸다.

순서만 단순히 암기하면 풀 수 있는 문제다. 과학 학습 차원에서 보면 전혀 좋은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반복해 출제하는 선생님에게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 처음 가르치실 때 그 내용을 충분히 알려주셨다. 소재는 바로 단풍이다.

나무들도 계절을 안다. 해가 짧아지면 기온도 점점 낮아지다고 곧 겨울이 닥친다는 걸 아는 거다. 겨울을 나야 하니 세포 안에 영양분(당분)을 쌓고 수분 증발을 막기 위해 이파리를 떨군다. 단풍은 이파리를 떨구기 전에 일어나는 일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초록색으로만 보이는 시금치에도 여러 가지 색소가 들어 있듯이 초록색 나뭇잎에도 여러 가지 색소가 있다. 하지만 이파리에 초록색인 엽록소가 워낙 많아 다른 색깔은 가려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해가 짧아지고 기온이 떨어지면 식물 세포는 “아, 이제는 광합성은 어렵겠구나. 이제 겨울을 날 준비를 하자. 엽록소, 그동안 수고했어. 하지만 이젠 그만 사라져줘야겠어”라면서 엽록소를 파괴한다. 물론 이 역할은 단백질 효소가 담당한다.

그러면 엽록소에 가려져 있던 노란빛의 크산토필과 붉은색의 카로틴이 드러난다. 은행나무는 크산토필이 압도적으로 많고 단풍나무는 카로틴이 훨씬 많은 경우다. 그렇다면 크산토필과 카로틴 같은 색소는 가을에 화려한 단풍으로 만산홍엽(滿山紅葉)의 계절을 연출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여 주말 고속도로를 꽉 막으려는 음모를 품고 그 무더운 여름을 버텼던 것일까?


설악산 수렴동 계곡.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럴 리가 없다. 자연은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 크산토필과 카로틴이 이파리에 있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크산토필과 카로틴은 엽록소가 흡수하지 못하는 약한 빛을 흡수해 그 에너지를 엽록소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알아주지 않을 뿐 그들은 꾸준히 일을 한다. 엽록소가 다 파괴된 단풍철에도 마찬가지다. 크산토필과 카로틴은 여전히 아주 적은 양의 광합성을 한다. 이들은 나무가 세포 속으로 물이라도 아끼려는 심정으로 이파리를 떨구는 마지막 순간까지 애쓰는 것이다.

내 얘기가 아니다. 서울 영동고등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치면서 b-a-크산토필-카로틴 문제를 반복해 내셨던 박찬홍 선생님의 말씀이다. “생물은 암기 과목이다. 특별히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고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지만 암기하고 나면 이해가 된다는 사실도 가르쳐주셨다. 선생님이 이파리의 색소를 통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분명하다. 큰일 하는 사람과 작은 역할을 하는 사람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작은 역할을 하는 사람은 그 존재마저 잊고 산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가 드러날 때도 엉뚱하게 기억하곤 한다.

TMT(투 머치 토커)인 내가 잔더 아주머니의 독일인 남편에게 크산토필과 카로틴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리 없다. 아저씨는 내가 떠들어도 눈을 감고 설악산의 단풍만 그리워했을 것이다. 감홍난자(酣紅爛紫)의 계절이 가까이 왔다. 우리 주변에서 드러나지 않게 애쓴 사람들을 찾아 감사할 때다.

이정모 국립과천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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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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