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로도, 군부대도, 기지촌도 모두 사라진 자리엔 벌판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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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로도, 군부대도, 기지촌도 모두 사라진 자리엔 벌판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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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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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덕
김시덕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편집자주

도시는 생명이다. 형성되고 성장하고 쇠락하고 다시 탄생하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우리는 그 도시 안에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다. 과연 우리에게 도시란 무엇일까, 도시의 주인은 누구일까. 문헌학자 김시덕 교수가 도시의 의미를 새롭게 던져준다.

<3> 김포선의 끝, 오쇠리 마을

김포선이 운행하던 철로 주변은 오늘날에도 당시의 경관을 남기고 있다. 철로가 놓였던 길 위에 형성된 도로의 주변에 보이는 공장과 집들은 철길이 있던 시기에 조성됐다. 김시덕 제공

오늘 걸을 곳은 경인선 부천역과 김포공항 사이를 운행하던 김포선이라는 사라진 철길, 그리고 김포선의 북쪽 끝에 2000년대 말까지 존재하던 오쇠리 마을이다.

김포선 철도는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을 위해 건설된 군용철도로 1951~1980년 운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용 물자 가운데에는 도로로 운반하기 곤란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미군은 항구·공항과 부대 사이에 군용철도를 부설한다. 김포선이 출발하던 부천역의 당시 이름은 소사역이었다. 한때 영종도까지 관할하던 부천군이 쪼개져서 부천군 소사읍이 부천시로 승격하면서, 소사역도 부천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 부천역 동쪽으로 한 정거장 가면 있는 소사역은 1998년에 새로 세워진 역이다.

옛 소사역에서 출발한 김포선은 커브를 틀며 서북쪽으로 향하다가, 중동 신도시의 남쪽인 계남고등학교에서 일단 끊긴다. 철로는 진작에 걷혔지만 이 구간의 도로와 그 주변 경관은 여전히 김포선 운행 당시의 모습을 남기고 있다. 1988년에 주택 200만호 건설계획이 발표되기 전까지 부천 중동 지역은 절대농지였으니, 폐선되기 전의 김포선은 끝없이 펼쳐진 중동 벌판을 달렸을 터이다.

김포선 연선의 풍경. 김시덕 제공

중동 벌판을 서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던 김포선은 서울 노량진 정수장에서 출발해 인천의 구도심인 송현동의 배수지까지 이어지던 수돗길과 지금의 부천체육관·약대공원 부근에서 교차했다. 김포선은 여기부터 진로를 동북쪽으로 돌렸다. 김포선은 경인공업단지를 관통하며 경인고속도로 부천인터체인지와 교차하고, 조금 더 동북쪽으로 올라가서는 김포공항까지 부평분지를 관통하며 올라갔다. 지금의 인천 계양구, 인천 부평구, 부천, 서울 강서구를 아우르는 부평분지의 마지막 흔적인 김포공항 주변의 절대농지를 가로지르는 김포선 열차의 모습을 기억하는 부천의 농민들을 여전히 많이 만날 수 있다.

그래픽=신동준기자


미군기지가 주둔하던 시절의 부대 배치도와 김포선 노선. 지도 오른쪽 하단이 캠프 리치먼드, 중간 하단이 캠프 아일러다. 자료 : ‘KOREA - A TOUR OF DUTY’ 사이트

김포공항을 지키던 미군 부대로 진입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김포선이 일반에 모습을 보이는 지점에 ‘오쇠리’라는 마을이 있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부천 고강동, 서울 강서구 공항동, 서울 강서구 오쇠동에 걸쳐 있었다. 식민지 시대 말기에 일본군의 군용활주로가 지금의 김포공항 자리에 만들어지면서 군부대의 기지촌으로서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광복 후 미군이 김포공항 주변에 주둔하면서, 캠프 리치먼드의 기지촌으로서 급속히 성장했다. 1960년대에는 미군을 상대로 하는 클럽이 3개나 있을 정도로 번성해, 당시의 부천군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고 한다(부천문화원 ≪부천문화≫ 72호). 오늘날 옛 오쇠리 마을의 중심이던 오쇠삼거리에서는 그런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다. 아니, 이곳이 마을이었다는 사실조차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오쇠리는 철저히 지도 위에서 지워졌다.

2004년 류기윤 기관사가 촬영한 오쇠삼거리(왼쪽)와 2020년 김시덕이 촬영한 오쇠삼거리. 같은 지역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경관이 바뀌었다.

캠프 리치먼드의 배후지로서 번성하던 오쇠리는 1970년대의 미군 재배치와 함께 기지촌으로서의 성격을 잃었다. 이와 함께 항공기 소음 문제가 대두되었다. 기지촌으로 번성할 때는 소음을 참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문제의 성격이 달라진 것이었다. 건물주들은 이른 시기부터 이주를 요구, 부천시와 서울시의 경계 지역인 작동에 까치울 마을을 조성해 이주했다.

나는 오쇠리 이주민이 정착한 까치울 마을을 방문하기 위해 ‘부대앞’이라는 이름의 정류장에서 내렸다. 오쇠삼거리에서 들리는 것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항공기들이 저음을 내며 낮게 서북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오쇠리 때와 마찬가지로 주민들은 여전히 군부대와 항공기 소음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는 주민들과 함께 이주한 것으로 보이는 오쇠중앙교회가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까지 지도 어플리케이션의 로드뷰에 보이던 십자가탑을 현재는 찾을 수 없었다. 지금 그곳의 지명인 작동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교회는 여전히 운영 중인 것으로 보아, 오쇠동으로부터의 이주민이라는 의식이 이곳 주민들로부터 점점 옅어져 가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한편 마을회관이라 할 까치울회관에는 '정초 / 착공 : 2001. 6. 7 / 준공 : 2001. 12. 15 / 건립 : 고강동(오쇠리) 새마을회'라고 적힌 머릿돌이 붙어 있었다.

'오쇠리'라는 지명이 보이는 까치울회관의 머릿돌. 김시덕 제공

건물주들이 안정적으로 이주한 반면, 한국의 재개발ㆍ재건축 과정에서는 언제나 그렇듯 세입자들은 그 지역의 주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따라서 적절한 보상도 받지 못한 채로 오쇠리에 남겨졌다. 2004년 12월 16일 부천일보에는 세입자 전숙자씨가 “시에서는 갈 곳도 없는데 무조건 이주하라고 다그치기만 하고 있다”며 “시에서 대책이라도 마련해 주고 철거했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이 기사가 나올 당시 오쇠리에는 90여세대 200여명이 남아 있었으며, 대부분이 기초생활수급권자ㆍ차상위계층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오쇠리 농협지소로 쓰이던 건물을 ‘오쇠리 세입자대책위원회 사무소’로 개조해서 몇 년에 걸친 극한 투쟁을 전개했다.

오쇠리 세입자대책위원회 사무소 건물. 2004년 류기윤 촬영

이들 오쇠리의 세입자들이 강경한 대응을 한 데에는, 여러 차례에 걸친 방화 의심 사건도 한몫했다. 2002년 11월 25일에는 원인 불명의 화재로 네 명의 아이가 사망하는 사고 또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화재의 원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만 주민들은 세입자를 쫓아내기 위한 방화로 의심했다. 당시 주민들은 화재 며칠 전에 카메라를 든 사람이 '화재가 발생한 집 정면을 향해 사진촬영'하는 것을 목격했다. 사진을 왜 찍느냐는 주민들의 질문에 그 사진가는 '풍경이 없어지니까 아쉬워 찍는다'고 답했다는데, 주민들은 이것이 '누군가에게(방화범) 사람이 살지 않는 집 위치를 알려주기 위한 사전 행위'였을 것으로 추정했다(2007년 2월 21일자 부천신문).

현직 KTX 기관사인 류기윤 선생은 철도ㆍ버스ㆍ항공기 등의 사진을 오랜 기간 촬영해온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도 2000년도 초에 김포선을 답사하던 중에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김포선 폐선을 답사하던 그는, 오쇠리 마을의 한 쪽에 버려진 열차 차량을 발견했다. 김포선을 운행하다가 이 노선이 폐선되면서 이곳에 버려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현재 김포선 열차 차량은 보존된 것이 없고, 멀리서 찍은 사진 이외에는 고화질로 촬영된 것도 없다. 하지만 류기윤 선생은 이 귀중한 열차 차량의 모습을 촬영하지 못했다. 마을의 분위기가 너무나도 삼엄해서 감히 카메라를 꺼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때에는 마을 사진을 찍었다가 경찰의 요구로 여러 장 삭제해야 했다.

부천 중구 안내판을 붙이고 있던 오쇠동의 농가. 2004년 류기윤 촬영

이런 삼엄한 분위기 속에 류기윤 선생이 간신히 찍은 사진 속에 보이는 농가의 문에는 '개발제한구역 / 부천 중구'라는 안내판과 함께 '고강1동 49번지 237호(오쇠동)'이라는 주소가 보인다. 부천시는 1988년에 중구를 설치했다가 1993년에 이를 원미구와 오정구로 나누었고, 2016년에는 책임 읍면동 제도에 따라 구를 폐지했다. 이 사진 속의 집은 오정구보다도 더 앞선 중구 시절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이 집의 뒤편으로는 평범한 농촌 풍경이 펼쳐져 있었고, 중년 여성이 마을 샛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벽돌 건물에는 소박한 교회가 입주해 있었다. 일반적인 농촌과 다른 점이라면, 미군 기지촌 주변에서 흔히 보는 길쭉한 상가 건물이 오쇠삼거리 주변에 밀집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빈집이 생길 때마다 즉각 철거하던 포클레인의 존재였다.

류기윤 기관사가 촬영한 2004년 오쇠동의 풍경들

한때 미군 기지촌으로, 그리고 부천과 서울의 경계 지점으로서 번성하던 오쇠삼거리에는 지금 단 한 채의 상가 건물과 주택이 남아 있다. 류기윤 선생이 마지막으로 이곳을 방문한 2008년 8월의 사진에는 이 상가 건물의 나무 문짝 위에 '보류'라고 적힌 붉은 글씨가 찍혀 있다. 그리고 2020년 8월에 내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에는 2008년에 철거가 '보류'된 상가 건물이 황량한 벌판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강서구청장과 항공청장에게 항의하는 내용의 플래카드가 상가 건물 옆의 주택 담벼락에 붙어 있었다.

오쇠동 마지막 건물의 2008년(왼쪽)과 현재의 모습. 류기윤 김시덕 제공


오쇠동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상가 건물 위로 비행기가 날고 있다. 김시덕 제공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항공기 운행이 급감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분에 한 대씩의 항공기가 이 집 위를 낮게 날고 있었다. 너무 낮아서 항공기의 종류도 쉽게 식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오쇠삼거리 남쪽에는 '오쇠동 입구'라는 버스정류장이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오쇠동의 이름을 전하고 있다. 이 버스정류장 안내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이렇게 빈터로 남겨둘 거였으면서 왜 그렇게까지 마을 주민들을 몰아내려 했을까'. 오쇠삼거리 북쪽에는 부천에서 유일하게 손글씨로 글자가 적힌 '대한항공 훈련센터'라는 버스정류장 간판이 있었지만 이 또한 몇 달 전에 새것으로 교체되었다.

오쇠동의 존재를 전하고 있는 '오쇠동 입구' 버스정류장 안내판. 김시덕 제공

김포선을 운행하던 철도 차량, 마을이 통째로 사라진 ‘오쇠동 입구’ 버스정류장 안내판과 무심히 교체된 ‘대항한공 훈련센터’ 버스정류장 안내판까지, 부평분지를 가로지르던 옛 김포선 철로 주변에서는 모든 것이 사라져 간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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