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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기적’이 준 숙제

입력
2020.10.13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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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지난 8일 오후 11시 7분께 울산시 남구 신정동의 한 33층짜리 주상복합 아파트에서 큰 불이 발생, 9일 진화작업을 마친 소방대원이 생수로 열기를 식히고 있다. 뉴시스

지난 8일 오후 11시 7분께 울산시 남구 신정동의 한 33층짜리 주상복합 아파트에서 큰 불이 발생, 9일 진화작업을 마친 소방대원이 생수로 열기를 식히고 있다. 뉴시스


추석 연휴 ‘집콕’ 중 우연히 본 재난 영화 ‘엑시트(EXIT)’. 가스 테러로 마비된 도심에서 주인공과 가족 등의 탈출을 그린 영화다. 시간이 갈수록 위로 차 올라 오는 유독가스를 피해 빌딩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분투하는 장면을 담았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비상계단에서 옥상으로 연결되는 출입문 앞에서 시작된다. 생고생해서 올라 온 그들은 잠긴 철문 앞에서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다. “왜 옥상문은 다 잠가두는 거야!”

관련 규정은 어떨까. 빌딩 옥상문은 보통은 잠겨있는 게 맞다. 원래는 열려 있어야 하지만 옥상이 청소년들의 우범지대가 되고 옥상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이들이 있어, 평소엔 잠겼다가 화재 등 긴급 상황이 생기면 열린다. 이 규정을 만들 당시 옥상문을 ‘열자’와 ‘닫자’ 사이에 의견 대립이 팽팽했는데, 소방청 절충안으로 정리가 됐다. 평상시 닫아놓되, 화재경보 시스템과 연동돼 화재시에는 자동으로 열리는 비상문을 설치하는 것이다. 웬만한 공동주택들은 2016년 시행된 이 법의 적용을 받는다.

영화 ‘엑시트’의 이 장면은 최근 주말 밤 국민들 가슴을 철렁하게 만든 울산 주상복합아파트 화재와 겹쳐진다. 당시 화마는 33층 높이 건물을 삼킬 듯 휘감았다. 많은 주민이 연기를 피해 대피소와 옥상으로 내달렸다. 다행히, 영화처럼 옥상문이 잠겨 있는 사태는 없었다. 숨을 아껴가며 올라온 꼭대기층에서 마주한 잠긴 옥상문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옥상문이 열려 있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더 많은 연기를 마셨을 것이고, 희생자 없는 ‘울산의 기적’은 없었을 수도 있다.

이번 기적의 주연은 망설이지 않고 화마 속으로 뛰어든 소방관들과 침착하게 대피한 주민들이다. 그러나 자동으로 열리는 옥상문 사례처럼 시행착오 끝에 구축된 ‘방재 시스템’ 역시 큰 몫을 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건물 상층부 한 공간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대피소’로 말끔히 비워놓도록 한 소방법, 적시에 옥상 출입문이 열리게 한 건축법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 생명을 구했다. 숱한 인명 사고를 거치며 구축된 건축ㆍ소방ㆍ재해 관련 시스템은 외형적 측면에서만큼은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춘 셈이다.

불과 5년 전인 2015년 1월 의정부 아파트 화재 사건만 되짚어 봐도 우리의 방재 시스템은 부족했다. 1층 불이 위층으로 옮겨붙었고, 소방차가 출동하고도 불법주차 차량들 때문에 초기 대응을 하지 못했다. 진화작전이 시작됐을 땐 불이 이미 주변 건물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져, 결국 5명의 사망자와 125명의 부상자를 냈다. 이후 불연 외부 마감재 사용 대상이 30층 이상 건물에서 6층 이상 건물로 강화됐다. 주택과 오피스텔, 숙박, 의료시설의 내부 마감재도 ‘모든 규모의 건물’에 대해 불연ㆍ준불연재 사용이 의무화됐다. 공동주택 옥상출입문 자동개폐장치 설치도 시행됐다.

울산 주상복합아파트 화재의 최초 발화 장소는 3층 테라스의 나무 데크로 확인됐다. 발화 원인은 당국의 조사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현재 분위기로 보면 담배꽁초에 의한 ‘실화’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사람이 문제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벽을 타는 엑시트 주인공 같은 ‘히어로’가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선, 개개인의 ‘안전 DNA’ 장착이 필수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울산 기적’은 우리에게 숙제를 줬다. 방재는 ‘사람’으로 완성된다.

정민승 지역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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