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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코로나19 재확산으로 독일 베를린에서 당분간 밤 11시 이후 식당, 상점 영업이 금지된 것을 두고 70여년 만의 '베를린 봉쇄'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모양이다. 독일은 2차 대전 직후 서부를 미국 영국 프랑스, 동부를 소련이 분할 통치하면서 동부 한가운데 수도 베를린도 같은 형태로 나누었다. 이때 보장했던 서베를린과 서독의 물자 수송을 스탈린이 화폐개혁 등 서독의 일방 조치에 반발해 1948년 6월부터 차단한 것이 '베를린 봉쇄'다.
□이 봉쇄는 미국과 영국 수송기의 대규모 물자 공수작전으로 1년 만에 철회됐지만 그즈음 서쪽에 연방공화국이, 동쪽에 민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독일은 본격적인 분단의 길을 걷게 된다. 독일 분단을 상징하는 또 다른 사건은 1961년 동독의 베를린 장벽 건설이다. 서독에 비해 시민의 자유나 경제 발전에서 뒤지는 것이 확연해지며 동독 주민의 탈출이 계속되자 이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1989년 장벽이 무너지기까지 때로 죽음을 감수하고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간 사람은 수백만명에 이른다.
□독일의 분단 극복은 철조망을 끊거나 땅굴을 파고, 북해에 보트를 띄우거나 오스트리아나 헝가리 등 제3국을 경유한 서독행 물결이 큰 동력이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밑거름은 비록 분단되었지만 단절된 적이 거의 없는 동서 교류 덕택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우편, 통신의 경우 제약이 있었지만 베를린 봉쇄 동안 잠깐을 제외하고는 끊긴 적이 없었고, 동서독 기본조약에 바탕해 1970년대 중반 우편통신협정 체결 뒤에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한반도 분단은 뼈아픈 전쟁 체험에다 핵문제라는 국제 안보 사안까지 겹쳐 독일과 사정이 다르다. 남북이 1991년 기본합의서 채택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정상회담까지 하고도 큰 진전을 보지 못하는 이유다. 하지만 소통의 끈을 통일의 씨앗으로 삼은 독일 사례를 돌이킨다면 인권 문제이기도한 이런 교류의 기회를 최우선해 넓혀가려는 남북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작은 발걸음'을 통한 전진이야말로 지금 목도하는 분단의 희생에 진정으로 보답하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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