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이 되는 꿈을 꾼다. 그 꿈속에서 나의 지상 과제는 당연히 세계 정복이다. 영화 속 미치광이 과학자처럼 나 또한 나름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 계획은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것만큼이나 간단하다. 1단계. 놀라운 바이러스 개발 능력을 가진 과학자 집단이 나를 광적으로 추종하게 만든다. 힘들겠지만 그들이 내 눈만 바라본다면 뭐 어떻게든 될 것이다.
2단계. 이 과학자 집단에게 자신이 싫어하는 외국의 언어를 배우지 않으면 1년 안에 죽음에 이르게 되는 바이러스를 만들어내게 한다. 살아남으려면 단순히 외국어를 배우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속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외국어 능력을 키워야 바이러스가 활성화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도 뭐 영화의 악당처럼 과학자들을 윽박지르면 어떻게든 되리라 생각한다.
드디어 3단계.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세계를 협박한다. 아마 다들 무시하겠지. 그러나 1년 후 사람들은 현실을 직시하게 될 것이다. 감염된 이들 중 내 경고를 진짜로 받아들이고 외국어를 익힌 이들은 살아남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이런 엉터리 악당이 정말로 나타난다면 한국어를 배우는 이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유감스럽지만 전망은 어둡다. 우선 한국어라는 언어 자체가 대부분의 외국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언어다. 1963년 미국의 소설가 로저 젤라즈니는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라는 SF 소설에서 이렇게 썼다. '화성어의 빙빙 돌려 말하기와 복잡한 완곡어법은 한국어를 능가할 정도였다.' 말인 즉슨 한국어는 외계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지금은 배워볼만한 언어, 배워보고 싶은 언어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한국어는 생경한 언어이다.
그렇지만 내가 한국어 학습자들 대부분이 악당의 희생자가 될 것이라고 보는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한국어 교실에서는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는다.'
그럼 뭘 가르치냐고? 한국어 교실에서는 한국어 대신 한국어 시험 잘 보는 기술을 가르친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내가 가르치는 한국어 교실에 앉아 있던 그 빛나는 눈빛들을 기억한다. 계속되는 좌절에도 한국어로 말하고 싶어, 한국어를 알아듣고 싶어, 한국어로 소통하고 싶어를 외치던 그 눈빛들. 두려움에 떨면서도 길거리에서 한국인들에게 길을 묻는 과제를 수행하던 상기된 얼굴들. 쉬는 시간에 한국어인 듯 아닌 듯한 자기들만의 언어로 즐겁게 떠들던 모습들. 열정으로 충만한 그 모습들은 한국어 교사들이 열악한 처우에도 일을 그만두지 못하게 붙들어 맸다. 그러나 한국어능력시험(토픽, TOPIK)이 절대 반지의 위세를 갖게 되고, 한국어 교실에서는 그런 모습들이 점점 사라져갔다.
교실의 풍경을 보면 변화를 알 수 있다. 이제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어 교육 기관에서조차도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자는 학생들이 보인다. 밤에는 '토픽'(TOPIK) 문제 풀이 수업을 하는 학원에서 시험 기술을 연마해야 하니, 낮에는 한국어 교실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것이다. 대학에 입학하려면 토픽 점수가 필요하니까 어쩔 수 없다. 한국어로 진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험 점수를 따는 게 우선이다.
그나마 이 정도면 양반이다. 존립을 위해 어떻게든 외국인 유학생을 유치해야 하는 대학들은 한국어교육 기관에 노골적으로 시험 문제풀이식 수업을 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게 한국어가 아닌 한국어 시험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한국어교육 현장의 당위이자 상식이 되었다. 가히 한국어 교실의 사막화라고 불러도 될 지경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진정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한국어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세상물정 모르는 한심한 이상주의자가 된다. 이주민들을 위한 한국어교육도 마찬가지다. 이주민들에게 한국어 의사소통 능력은 한국 사회 안에서 생존과 직결되어 있지만, 이들을 위한 한국어교육도 시험을 중심에 두고 이루어진다. 진짜 한국어 능력? 그건 각자도생, 자기 스스로가 알아서 키워야지.
평가하는 것, 그리고 그 평가 결과를 활용하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교육 과정의 완성은 평가이며, 평가가 자리 잡았다는 것은 교육 과정이 하나의 온전한 체계로 기능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평가는 제대로 작동하기만 한다면 환류 효과를 통해 교육 과정의 문제점을 개선시키는 순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엉뚱한 환류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평가가 교육 과정에서 '교육'을 사라지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평가라는 비대하다 못해 거대해진 꼬리가 너무나 왜소해진 교육 과정이라는 몸통을 흔들게 되었다. 지금 한국어교육의 모습은 흡사 아기 고양이의 몸통에 시베리아 호랑이의 꼬리가 달려 있는 꼴이다. 아니다. 꼬리에 몸통이 매달려 있다고 하는 게 차라리 더 정확하겠다.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는 한국어 교실. 이 모순의 교실에서는 시험 공화국 한국 사회가 품은 욕망과 부조리가 그대로 재현된다.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풍경이다.
10월 9일 한글날. 세계 속에서 높아지는 한국어의 위상을 자화자찬하는 기사가 잔뜩 쏟아질 오늘. 그래서 많은 이들이 뿌듯해 할 오늘. 미안하지만 나는 악당 노릇을 하려 한다. 눈을 크게 떠라. 그리고 거대하고 화려한 꼬리가 아닌, 점점 말라비틀어지고 허물어져 가는 저 한국어교육의 몸통을 보라. 꼬리에 짓눌려 질식사할 위기에 처한 저 몸통을.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