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추석을 쇠면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그때를 떠올리면 종종 나를 데리고 산책을 했던 정겨운 기억이 있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중 가슴에 남아 있는 말이 있다. “아들아, 사람은 머리가 좋아야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란다. 또 마음보다는 손이, 손보다는 발이 더 중요하단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에게 아버지는 계속해서 말씀을 이어갔다. “만약 네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돕고 싶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겠니? 너는 ‘머리’로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마음’으로 공감하며 ‘손’으로 도움을 줄 수 있어. 그렇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발’이란다.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지.”
이런 지혜를 한자 성어로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것은 사실 무척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농업에 제법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던 필자도 농촌문제를 객석에서 영화 감상을 하듯 관람했던 적이 있다. ‘농촌이 정말 어렵구나’ ‘도움이 필요하구나’라고 말은 많이 했지만, 실제로 제대로 된 방향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이처럼 한 발짝 뒤에서 그저 관전하는 자세로는 농업의 작은 문제 하나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농민이 필요한 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 농촌의 치열한 현실 속으로 직접 들어가 그들의 입장에 서서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에 대한 처절한 고민이 부족했던 탓이었다.
필자가 민간연구원으로 일하던 시절, 문득 책상머리에만 앉아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커다란 지도에 직접 다녀온 농촌지역을 차례로 표시하며 모든 농촌지역을 방문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후 여러 곳을 방문하여 농민들과 밤이 새도록 토론을 하고 고민거리를 나누었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다음에야 그 지도는 표시들로 가득 채워질 수 있었다. 한 곳도 그냥 스쳐 지나칠 수 없었기에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오히려 나에게 많은 지혜와 가르침을 주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하면 농업을 발전시키고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여러 방안이 제시되었다. 새로운 정책이 나올 때마다 보랏빛 청사진이 펼쳐졌다. 그대로 실행되었다면 우리 농업은 이미 세계 수준의 경쟁력을 가졌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의 농업 경쟁력은 여전히 취약하다.
우리가 새로운 길, 성공하는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것들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여기 물이 가득 채워진 컵이 있다고 해보자. 이 컵에다 물을 계속 부으면 넘쳐흐르기만 할 뿐, 더는 물을 채울 수 없다. 컵을 비워야만 새 물이 들어갈 수 있다. 한국 농업을 망하게 하는 요인을 찾아내고, 그것을 버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절실하다. 누구나 말하는 성공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무엇 때문에 ‘실패’하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이다.
4차 산업혁명의 신기술로 새로운 농업혁명이 꿈틀거리고 있고 코로나19로 인해 기존 시스템의 변화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이 역발상이 한국농업의 발전에 전환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역지사지의 정신, 즉 농민의 시선으로 농업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이다. 나도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다시 한번 지도를 펼치고 한 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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