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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2016년 2월 23일 오후 7시5분,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은 본회의에 상정된 테러방지법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을 시작했다. 이후 총 192시간27분(8일0시27분) 동안 38명의 의원이 연단에 올라 세계 최장 필리버스터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필리버스터의 열기는 뜨거웠다. 은수미, 박원석, 이학영, 심상정 등 민주화·시민·노동·인권 운동을 하며 고문이나 인권 침해를 직접 겪은 당사자들이 토론에 나서자 기본권 제한이 화두로 부상했다. 국회방송 시청률이 개국 이래 최고로 나오고 만석이 된 본회의장 방청석은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학습의 장으로 거듭났다.
□아쉽게도 그게 끝이었다. 같은 해 4월 20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원내 1당이 됐지만 테러방지법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보다 못한 무소속 윤종오 의원이 테러의 정의가 모호하다며 폐지법안을 발의했지만 여기에 서명한 민주당 의원은 122명 중 5명에 불과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하고 민주당이 지난 4월 21대 총선에서 176석 거대 여당이 된 뒤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얼마 전 이병훈 민주당 의원이 코로나 검사와 치료를 고의로 거부하는 행위를 ‘테러’로 간주하는 내용의 테러방지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야당 때 악법이라고 반대한 테러방지법 독소조항을 개정하기는커녕 반대편을 진압하는 데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8·15 광복절 집회를 막무가내로 열어 바이러스를 확산시킨 보수진영의 몰지각과 무책임이 아무리 미워도 이렇게 표변할 수 있나.
□여당 의원들이 코로나19 방역을 이유로 아예 집회ㆍ시위를 막는 법안을 제출하고, 정부가 지난 3일 개천절 집회를 막기 위해 광화문에 경찰버스를 겹겹이 쌓아 ‘재인산성’이라는 비아냥을 들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들이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한다며 만 8일 동안 쉬지 않고 열변을 토했던 사람들이 맞나 싶다. 시간이 지나면 열정은 식고 추억도 엷어진다지만 제 얼굴에 침 뱉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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