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2014년 송파, 2020년 창원

입력
2020.10.08 04:30
26면
0 0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추석 당일이었던 1일 오후 경기 성남시 안나의집 앞 도로변에서 한 노숙인이 안나의집에서 받은 도시락을 먹고 있다. 이승엽 기자

추석 당일이었던 1일 오후 경기 성남시 안나의집 앞 도로변에서 한 노숙인이 안나의집에서 받은 도시락을 먹고 있다. 이승엽 기자


재택근무와 언택트 추석 이후 체중을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집에 있으니 활동이 준 데다 냉장고 안 맛난 것들의 유혹을 물리치기도 어렵다. 휴대폰 클릭에 조리음식이 배달되고 밤에 주문한 식자재가 새벽이면 도착하는 세상이라, 집에서 배를 주릴 걱정은 없다.

집은 정신에 안식을 주며 육신에 풍요를 제공하는 안녕과 채움의 장소다. 그러나 동시대를 사는 어떤 이들에게 집은 허기와 결핍의 공간이다. 우리가 과체중을 걱정하며 감량에 몰두하는 새, 아직도 이 땅엔 집에서 마땅히 만끽해야 할 평안과 포만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믿기 어렵지만 2020년 한국에선 집에서 사람이 아사(餓死)한다. 지난달 창원시 원룸에서 어머니(52)와 딸(22)이 숨진 지 20여일 만에 발견됐다. 딸에게 경계성 지능장애가 있었고, 일용직 어머니도 정신과 진료를 받았단다. 어머니가 먼저 돌연사한 뒤, 딸은 굶주리다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지난해 7월 서울 관악구에서 발생한 탈북 모자 사망의 원인 역시 굶주림이었다.

열 살과 여덟 살, 인천의 두 아이도 집에서 굶어야 했다. 아이들은 어른 없는 집에서 라면을 끓이다 불이 나 심한 화상을 입었다. 전부터 이 형제가 학대받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지만, 이들을 배고픔에서 건져 올릴 사회안전망은 작동하지 않았다.

동료 기자가 무료급식소의 추석을 취재한 기사(본보 10월 5일자 1면)엔, 도시락 하나를 받으러 대전서 성남을 오가는 노인의 사연이 등장한다. 도시락 하나로 이틀을 버티는 그들은 배부름이 두렵다. 한끼를 배불리 먹으면 나머지 다섯 끼 더 큰 배고픔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9월 14일 인천 미추홀구의 한 빌라 건물 2층 A군(10) 거주지에서 불이 나 A군과 동생 B군(8)이 중상을 입었다. 사고는 어머니가 집을 비운 사이 형제가 단둘이 라면을 끓여먹으려다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인천 미추홀소방서 제공) 뉴스1

9월 14일 인천 미추홀구의 한 빌라 건물 2층 A군(10) 거주지에서 불이 나 A군과 동생 B군(8)이 중상을 입었다. 사고는 어머니가 집을 비운 사이 형제가 단둘이 라면을 끓여먹으려다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인천 미추홀소방서 제공) 뉴스1


포용적 복지라는 정부의 철학, 연간 보건ㆍ복지ㆍ고용 예산 200조원(내년 예산안 기준), 이 거대한 그늘에 가려진 우리 복지의 민망한 현실이 이렇다.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에서 드러난 성긴 복지체계의 숱한 구멍은 아직 메워지지 못했다. 생활고에 허덕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송파 모녀의 사연이 알려지자, 여론은 분노했고 언론은 선별복지의 사각지대를 조명했지만, 먹지 못해 생명이 위협받는 암울한 비극은 여전하다.

기초수급자에게 생계ㆍ의료ㆍ주거ㆍ교육의 지원 혜택이 주어지기는 한다. 비극을 당한 이들이 적극적으로 혜택을 찾았더라면, 배를 주릴 상황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란 의견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사회안전망은 스스로 나서 빈곤을 알리며 제 몫을 적극 따내려는 이들만 감싸 안는다. 몰라서, 아파서, 또 어떤 이유로든 몫을 챙기지 못한 이들은 안전망 밖으로 추락하고 만다. 복지의 덩치는 커졌으되 ‘찾아가는 복지’의 정착은 요원하다.

건강이 온전치 못한 창원 모녀를 자주 들여다 볼 장치가 있어야 했고, 인천 형제에 대한 학대 사실이 받아들여져 보호조치가 이뤄져야 했으며, 대전서 성남을 오가는 노인이 집 근처에서 식사를 해결할 곳이 있어야 했다. 굶주림을 막는 기본적 복지까지 우린 아직 멀리 있다.

“행정력이 거기까진 미칠 수 없다”는 말은 납득 못하겠다. 우리는 코로나 사태를 거치며 입법과 사법의 제한적ㆍ사후적 권한을 넘어서는 행정의 무궁무진한 확장성과 무시무시한 신속성을 절감했다. 한국 행정의 역량이라면 굶는 이를 찾는 작업은 애써 숨은 확진자를 추적하는 것보다 쉬운 일일 지 모른다. ‘추적 방역’으로 입증한 행정의 효율성을, 끼니 굶는 사람들을 살리는 ‘추적 복지’에 쏟을 때다. 이제는 나랏님이 가난을 구제할 수도 있는 세상이다.

이영창 사회부 차장

[기자사진] 이영창

[기자사진] 이영창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