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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시청률 29.0%, ‘(플)라톤 형’ ‘(하버)마스 형’으로 변주되고 있는 신곡 ‘테스 형’ 등 추석 연휴를 휩쓴 나훈아 신드롬이 대단하다. 추석 전야 KBS 나훈아 콘서트는 70대에도 짱짱한 목청과 열정, 화려한 쇼맨십으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2020 한가위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라는 제목이 말하듯 코로나19 위기에 지친 국민을 위로한다는 취지는 달성한 듯하다. 정치권이 나훈아의 멘트를 놓고 설전까지 벌이고 있으니 그 이상이다.
□그러나 나훈아 콘서트에서 드러난 부조화를 짚지 않을 수 없다. 무대 4면을 채운 LED 화면과 컴퓨터그래픽은 웅장했으나 이 스펙터클이 서민의 시름, 소박한 서정을 노래하는 트로트와 어울리는지는 의문이었다. 다채로운 연주자들이 협연했으나 대부분 나훈아보다 한 발 뒤에 세워 소모품 느낌을 주었다. 세계 각국 시청자를 연결한 KBS의 스케일 또한 대단했으나 전반적인 과잉 연출은 ‘미스터 트롯’의 유행을 좇으려는 것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부조화의 핵심은 “이 나라를 지킨 것은 국민 여러분”이라는 나훈아의 멘트와 달리 ‘알파 메일(우두머리 수컷)’의 무대로 연출된 데에 있다. “요즘 힘 빠진 가장을 위로하겠다”며 남자들만 앞으로 나오라 주문한 뒤 ‘남자의 인생’을 부른 대목이 대표적이다. 콘서트의 피날레는 록밴드의 샤우팅으로 시작한, “입술 한번 깨물고 사내답게 웃었다”는 가사의 ‘사내’였다. 나훈아에겐 가왕(歌王) 조용필을 능가하는 수식어 가황(歌皇)을 붙였다.
□나훈아의 쇼는 쇼로 즐기면 된다. 어떤 이들에겐 그의 노래가 어필했을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 위기 극복의 메시지를 담은 대기획으로서 ‘마초 영웅’을 소환한 KBS의 시대착오는 아쉽다. 홑벌이 남성 가부장이 생계를 책임지던 시대도 지났지만, 이 위기에 정말 위로가 필요한 약자는 따로 있다. ‘대한민국 어게인’을 내걸었다면 “세월의 모가지를 비틀어서 끌고 가겠다”는 나훈아 메시지와는 좀 다른 것을 던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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