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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중의 을' 인니 가사도우미는 어떻게 싱가포르를 뒤집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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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중의 을' 인니 가사도우미는 어떻게 싱가포르를 뒤집었나

입력
2020.10.03 11:00
수정
2020.10.04 00:49
0 0

대부호 집 절도 누명 4년만에 벗어?
갑의 위선과 불공정 깨부순 을의 승리

파르티 리야니(왼쪽 사진)씨와 리우문롱 전 창이공항그룹 회장. BBC 캡처

파르티 리야니(왼쪽 사진)씨와 리우문롱 전 창이공항그룹 회장. BBC 캡처

'여성, 외국인, 가사도우미.' 삶의 외피만 따지면 약자 중의 약자다. 사건 결말도 뻔해 보였다. 대부호의 고소, 검찰의 구형과 법원의 판결은 예상했던 대로 흘러갔다. 그러나 사필귀정, 시간은 정의 편이었다. 4년 뒤 반전은 나라 안팎을 뒤집었다. 부자의 위선과 사법체계의 불공정에 사람들은 분노했다. 부자는 모든 직책을 내려놓았고 사건을 담당한 경찰들과 검사 두 명은 조사 대상에 올랐다. 영국 BBC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빗댔다. 싱가포르 회장집 절도범에서 정의를 바로 세운 영웅으로 떠오른 인도네시아 가사도우미 얘기다. 한 달간 싱가포르를 달군 사건을 현지 매체 보도를 바탕으로 재구성한다.

파르티 리야니(46)씨는 2007년부터 리우문롱(74) 창이공항그룹(CAG) 회장 집에서 일했다. 창이공항은 동남아 최대 공항이다. 리우 회장은 2009년부터 CAG 회장이었고, 2013년부터 싱가포르 대기업 수르바나주롱 회장을 겸임했다.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의 선임 고문, 테마섹재단 이사도 맡았다. 싱가포르 재계의 '갑(甲) 중의 갑'이다.

파르티씨는 2016년 3월 분가한 리우 회장 아들의 집안일과 사무실 청소까지 떠맡았다. 당시 파르티씨의 월급은 600싱가포르달러(51만원), 싱가포르 내 외국인 가사도우미의 평균 월급이 597싱가포르달러인 걸 감안하면 우리 돈으로 2,500원을 더 받은 셈이다. 추가 업무에 불만을 품은 파르티씨는 그 해 10월 28일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했으나 해고됐다. 화가 난 파르티씨는 당국에 신고하겠다고 말하고 짐 상자 3개를 부쳐달라고 한 뒤 인도네시아로 돌아왔다. 항소심 판결문엔 "파르티씨가 당국에 신고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리우 회장 측이) 짐을 꾸릴 충분한 시간도 주지 않고 쫓아냈다"고 적혀있다.

다음날 리우 회장 가족은 파르티씨의 짐을 뒤져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물건을 꺼내는 장면을 21초 분량의 동영상으로 찍었다. 명품 가방 2개와 고급시계 2개, 액세서리, 전자제품 등이었다. 이튿날 리우 가족은 경찰서를 찾아갔고 경찰은 사건만 접수하고 해당 물건들을 돌려줬다. 리우 가족이 가져온 물건들이 애초 파르티씨 짐 안에 있던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파르티씨는 버려진 걸 주웠거나 자신이 짐에 싸지 않은 물건이라고 항변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진품인지 명확하지 않고 일부 망가진 것도 있다"고 밝혔다.

리우문롱 전 창이공항그룹 회장의 아들. 스트레이츠타임스 캡처

리우문롱 전 창이공항그룹 회장의 아들. 스트레이츠타임스 캡처

한 달여 뒤인 12월 2일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싱가포르에 돌아온 파르티씨는 창이공항에서 체포됐다. 경찰의 현장 조사는 다음날 이뤄졌다. 사건을 접수한 지 5주가 지난 뒤였다. 파르티씨 조사 과정에서 경찰은 언어가 다른 말레이어 통역사를 부르거나 통역 없이 조사를 진행했다. "파르티씨의 입장이 제대로 전달됐을 리 없다"는 게 항소심 재판부 판단이다.

약 5만싱가포르달러(4,200여만원) 상당 144개 품목과 관련된 4건의 절도 혐의로 기소된 파르티씨는 지난해 3월 2년2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다만 절도 액수는 3만4,000싱가포르달러(2,900만원)로 줄었다. 파르티씨는 즉각 항소했다. 그 사이 파르티씨가 고발한 부당한 추가 업무에 대해 노동당국은 리우 회장의 아내와 아들에게 주의 조치만 했다.

반전은 19개월이 흐른 지난달 4일 벌어졌다. 대법원격인 항소법원이 100쪽 분량 판결문을 통해 최종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리우 회장 가족의 부적절한 동기, 훔쳤다는 물건의 석연치 않은 기록, 경찰 수사의 문제점 등을 조목조목 지목했다. 나흘 뒤 파르티씨는 다섯 번째 혐의(사기)까지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4년 만에 누명을 벗은 것이다. 판결 직후 샨무감 내무부 겸 법무부 장관은 "판사의 결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조사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를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파르티씨가 풀려난 이틀 뒤인 지난달 10일 리우 회장은 자신이 맡고 있던 4개 직책을 모두 내려놓았다. 그는 "법원의 결정을 존중하고 조직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물러난다"고 말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퍼진 네티즌들의 비난이 사임 배경으로 거론된다. 지난달 23일 파르티씨는 자신의 사건을 담당한 검사 2명을 상대로 법원에 진정을 제기했다.

파르티 리야니(오른쪽)씨가 무죄 판결 직후 변호사와 함께 취재진 앞에 섰다. 스트레이츠타임스 캡처

파르티 리야니(오른쪽)씨가 무죄 판결 직후 변호사와 함께 취재진 앞에 섰다. 스트레이츠타임스 캡처

현지 매체들은 이번 사건이 부자와 고위층이 어떻게 빈자와 약자를 괴롭히고, 관계 기관들이 어떻게 부자와 고위층 편을 드는지 여실히 드러냈다고 평했다. 싱가포르 내 '을(乙) 중의 을'인 외국인 가사도우미의 열악한 실태도 다시 조명되고 있다. 현재 싱가포르엔 약 25만명의 외국인 가사도우미가 있다. 다섯 가구 중 한 곳이 고용하고 있다. 23~50세인 이들은 필리핀, 인도네시아, 미얀마, 캄보디아 등 주변 국가 출신들로 평균 월급이 597싱가포르달러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집안일을 묵묵히 돕는 귀한 존재들이다.

그런데도 싱가포르에선 폭행과 폭언, 갖은 횡포 등 고용주의 가사도우미 학대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하루 한 끼만 먹였다." "병균을 옮겨왔다고 때렸다" 등 가사도우미의 폭로도 간간이 이어졌으나 그때뿐이었다. 파르티씨 사건은 싱가포르의 오늘을 반성하고 내일을 개선하는 전환점이다. 갑질 사건이 종종 벌어지는 우리나라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파르티씨는 누명을 벗고 풀려난 날 이렇게 말했다. "고용주를 용서합니다. 다만 다른 노동자를 저처럼 대하지 않길 바랍니다." 짧지만 울림은 깊다.

자카르타= 고찬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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