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영문학개론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교수님 별명이 저승사자일 만큼 학생들의 원망과 원성도 끊이지 않았다. 이유는 주로 시험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출제 방식이 특이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해도, 꼭 엉뚱한 곳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은 내용을 물었다. 이를테면 낭만주의 시인 키츠의 대표작을 공부하면 그의 애인 이름을 적으라는 식이었다. 덕분에 F학점이 유독 많았다. 워낙에 대쪽 같은 교수님인지라 절대 사정을 봐주는 법이 없어 끝내 졸업하지 못한 학생들도 적지 않았으나 전공필수였기에 달아날 재간도 없었다.
시험 문제를 그렇게 내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래야 학생들이 요령을 부리지 않고 책을 꼼꼼하게 읽는다는 것이다. 그 나름 일리 있는 논지였다. 지엽적인 문제를 따지고 들면 중요한 사안이야 자연스레 해결되지 않겠는가?
조국 전 법무장관과 추미애 법무장관의 뉴스들을 접했을 때 난 잠시 SF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동양대 표창장이든, 휴가 연장이든 그 정도의 사소한 특혜가 언제부터 온 나라를 뒤집을 만큼 엄청난 범죄로 여겨진 걸까? 내가 잠든 사이에 훌쩍 미래세계로 날아온 건가? 그래, 드디어 털어서 먼지 하나 나오면, 매일매일 뉴스매체에 오르고, 수십 차례 압수수색을 할 정도로 깨끗한 나라가 된 거야! 그래서 언론이 연일 톱기사로 올리고 학생들이 공정사회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는 것이겠지?
오해할 까봐 밝혀 두지만 난 두 장관의 자녀 수사에 찬성하는 쪽이다. 더 큰 범죄와 비리에 비추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하지만, 그거야 어차피 특권층 이야기다. 좋은 부모 잘 만나 호의호식하다가 고생 한 번 안 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오를 사람들을 왜 빈한하기 짝이 없는 나까지 나서서 걱정한단 말인가? 그보다는 영문학 개론 교수님이 지엽적인 문제로 우리를 괴롭혔듯, 저렇게 사소한 불공정까지 털다 보면 지금껏 그러려니 해왔던 특권, 불법, 편법 등 보다 중요한 문제에 고개를 돌리리라는 기대가 더 컸다.
SF소설만큼이나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바람이리라. 수사 자체가 공정사회에 어긋나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특권과 특혜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후 다른 곳에서 그보다 더한 불공정과 범죄들이 드러났지만 검찰은 묻지 않고 언론도 묻지 않았다. 학생들도 입을 다물었다. 며칠 전 신문에 유명 대학 교수들이 자녀들에게 무더기 A+학점을 주고 법인카드로 유흥업소를 드나들며 거액을 썼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조국 전 법무장관을 규탄하며, 촛불시위까지 벌였던 학생들은 이번에도 분노할까? 아니면 그 정도는 자신들의 현재와 미래에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라며 외면할까? 형식적으로나마 성명 하나 정도는 발표하겠지? 이런 생각까지 하는 걸 보면 의대생들의 시위를 보며 나도 엔간히 삐딱해진 모양이다.
영문학개론 교수는 바람대로 지엽적인 문제들을 통해 더 중요한 개념들을 깨우치게 했을까? 아니, 현실은 그 반대였다. 학생들이 졸업하지 못하며 원성이 높아지자 학교에서는 과목을 전공 선택으로 돌리고 수업도 한 학기로 줄였다. 결국 학생들이 수강을 기피하면서 과목은 폐강되고 F학점의 주인공들은 쉬운 대체 과목을 찾아 무사히 졸업했다. 실험이 실패한 것이다. 답답한 시절, 공정이 그렇게 어려우면 상식과 염치라도 챙기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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