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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세간살이가 있어야 명절을 쇠지" 한숨만 쉬는 구례의 '恨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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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세간살이가 있어야 명절을 쇠지" 한숨만 쉬는 구례의 '恨가위'

입력
2020.09.28 01:0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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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명 임시 거주시설서 명절맞이
생계 캄캄한데 차례 엄두 안나
수해 50일 지나도 복구ㆍ배상 아직
더딘 책임규명ㆍ대책에 불신 확대

지난달 수해로 마을 전체가 물에 잠겼던 전남 구례군 구례읍 양정마을 회관 앞에 모인 주민들이 정부의 조속한 보상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하태민 기자

지난달 수해로 마을 전체가 물에 잠겼던 전남 구례군 구례읍 양정마을 회관 앞에 모인 주민들이 정부의 조속한 보상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하태민 기자


"추석이 코앞인데 조상님께 차례상 올릴 엄두가 안 납니다. 복구도 끝나지 않았는데 명절을 어떻게 쇠나요." 지난 23일 오후 전남 구례군 구례읍 양정마을. 마을 입구에서 비닐하우스 수리를 하던 김모(57)씨의 얼굴에선 시름이 한가득 묻어났다. 마을로 들어가는 농로 주변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무너져 내린 비닐하우스 철제 구조물이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아직 치우지 못한 쓰레기 더미도 보였다. 마을은 여전히 수마(水魔)가 할퀸 상처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김씨는 "물난리가 난 뒤 매일 하우스 밭을 찾아 복구작업에 매달렸지만 언제쯤 원상회복이 될지 막막하다"며 "복구비 마련도 걱정되고 생계를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 명절 쇨 정신이 어디 있겠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김씨는 "비닐 씌우고 장비를 새로 들이려면 1억원이 넘게 드는데 고작 100만원 받은 지원금으로는 하루 인건비도 안 된다"고 하소연했다. 농가에 따르면 660㎡ 크기의 비닐하우스 1동을 복구하는데 철제 구조물을 제외하고도 2,000만원가량 소요된다.


양정마을 입구에 환경부와 수자원공사를 규탄하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하태민 기자

양정마을 입구에 환경부와 수자원공사를 규탄하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하태민 기자


그나마 복구 작업을 할 수 있는 김씨의 사정은 좀 나은 편이다. 대부분 농가는 수리비를 마련하지 못해 수해가 난 지 50여일이 지나도록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 35년간 오이를 재배한 이모(55)씨는 "한해 벌어 그 해 먹고 사는데 쌓아둔 돈이 어디있겠냐"며 "망가진 하우스를 보면 울화통이 치민다"고 토로했다. 이씨는 "집수리에다 살림살이를 새로 장만하면서 주머니를 탈탈 털었는데 다시 농사를 지으려면 빚을 더 내야 할 판"이라고 격앙됐다.

축산농가의 시름도 깊다. 이 마을에서는 한우 1,670여마리 중 737마리가 폐사했다. 농가는 축사 복구비와 소를 들여올 자금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다. 전용주(56) 양정마을 이장은 "축산하면서 빚 없는 농가가 거의 없다. 대부분 억대의 빚을 안고 소를 키우고 있다"며 "축사를 신축하려면 평당 50만~60만원이 드는데 보상이 더뎌 고통이 크다"고 했다. 전씨는 "올 추석은 제사도 명절도 없다. 일가친척이 찾아와도 달갑지 않다"며 "세간살이가 있어야 음식을 장만할 텐데 준비할 겨를이 없다"고 참담한 분위기를 전했다.


지난달 8일 내린 폭우로 물에 참긴 구례읍내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달 8일 내린 폭우로 물에 참긴 구례읍내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구례읍은 지난달 7~8일 내린 폭우와 댐 방류로 섬진강 지류인 서시천 둑이 터지면서 읍내 40%가 물에 잠겼다. 주택 715동, 상가 579동이 침수피해를 입었고 이재민 1,149명이 발생했다. 1,807억원의 재산피해가 났으며 농경지 502㏊와 비닐하우스 546동이 피해를 봤다. 가축 1만5,846마리가 죽거나 물에 떠내려갔다. 공공시설 침수 피해도 심각했다. 상하수도사업소가 완전히 침수돼 한동안 하수처리 기능이 마비됐고 생태공원, 종합사회복지관, 문화예술회관, 평생교육원 등도 물에 잠겼다.

현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재민 180여명은 구례군이 빌린 숙박업소나 공공기관 연수 시설 등에서 임시 거주 중이다. 이재민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로 설치 중인 전기와 수도 설비를 갖춘 조립주택 50동에 28일부터 입주해 이곳에서 추석을 보낼 예정이다. 집으로 돌아간 주민 상당수도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 방바닥 습기가 제거되지 않아 축축한 바닥 위에 텐트나 스티로폼을 깔고 생활하는 주민도 있다고 군 관계자는 전했다.


정세균 국무총리가 추석을 앞둔 26일 구례군 마산면 상하수도사업소 앞에서 지난달 집중호우 피해 주민들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세균 국무총리가 추석을 앞둔 26일 구례군 마산면 상하수도사업소 앞에서 지난달 집중호우 피해 주민들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 큰 문제는 이번 수해의 뚜렷한 원인 규명과 배상 대책이 마련되지 않아 주민들의 고통과 불신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 양정마을 길목 곳곳에는 환경부와 수자원공사를 규탄하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전 이장은 "신속히 수해를 복구하고 일상을 되찾는 게 절실하지만 보상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며 "수천만원의 복구비를 감당 못한 주민들은 갈 곳이 없다. 환경부와 수자원공사는 댐 방류로 인한 인재(人災)를 인정하고 책임있는 대책을 조속히 내놔야 한다"고 호소했다.

주민들은 정세균 국무총리가 수해 복구 현장답사를 위해 찾은 26일 오후 구례군 상하수도사업소 앞에서 '섬진강 수해참사는 인재다. 정부가 100% 배상하라', '구례를 살려달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정 총리는 이 자리에서 "섬진강댐의 물관리 문제와 관련해 환경부는 적당하게 감추거나 사실을 왜곡하거나 할 생각이 전혀 없다"며 "천재(天災)인지 인재인지 냉정하게 확인하고 또 공정하고 투명한 조사와 책임규명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자치단체인 구례군도 주민 보상과 수해방지 대책 외에도 수천억원에 달하는 복구비용 마련에 비상이 걸렸다. 항구적인 복구를 위한 비용은 지역 한 해 예산보다 많은 3,400억원으로 추산된다. 이중 국비와 도비를 제외하더라도 군비 부담분은 400억원정도다. 열악한 재정상황에서 재원 마련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구례군의 재정자립도는 6.9%로 전국 226개 기초지자체 중 219위다. 군 관계자는 "예비비 61억원 중 45억원을 확보해 복구에 나섰지만 쓰레기 처리 비용만도 200억원이 넘어 복구 작업을 외상으로 맡기고 있는 실정이다"며 "정부의 복구예산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구례=글ㆍ사진 하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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