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수원의 광교호수공원 인근 하늘에 폭 30m에 달하는 그물이 펼쳐졌다. 푸른빛이 감도는 가느다란 노끈과 밧줄이 거미줄처럼 엮인 그물은 바람에 따라 공중을 부유한다. 낮에는 부드럽게 고동치며 땅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밤에는 여러 색의 조명을 받아 제 존재의 화려함을 드러낸다. 이 출렁이는 아름다운 그물은 미국 출신의 세계적인 설치작가 재닛 에힐만(54)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인 ‘어스타임 코리아(Earthtime Korea)’다.
최근 이메일 인터뷰로 만난 에힐만은 “어스타임 시리즈는 한 지역에서 일어난 지진 같은 지구의 활동이 전세계에 어떻게 퍼져 나가는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라며 “이 시리즈를 통해 우리는 서로 연결돼 있다는 자각, 우리가 연결된 방식, 그리고 물리적 세계에 대한 인식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작가는 어스타임 시리즈를, 미국 덴버(2010년)를 시작으로 호주 시드니(2011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2012년), 중국 베이징(2017년), 스페인 마드리드(2018년), 홍콩(2019년) 등 전세계 곳곳에 만들었다.
이번에 수원에 상륙한 '어스타임 코리아'는 2010년 칠레 대지진 당시 태평양으로 퍼져 나간 파도의 높이를 측정한 데이터를 작품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2010년 2월 27일 발생한 규모 8.8의 칠레 대지진은 526명의 사망자와 80만명의 이재민을 발생시킨 사건이었다.
말하자면 한국과 지구 정반대편에 있는, 이제는 오래된, 그래서 우리 머리 속에서 지워져버린 칠레 대지진이 작가 덕에 한국에 상륙한 셈이다. 아름답게 일렁이는 그물은 '그건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잖아'라고 손쉽게 말하지 말라는, 작가의 부드러운 타이름 같기도 하다.
작가는 작품 구상, 제작에다 한국적인 맥락도 심어넣었다. 에힐만 작가는 “한국의 전통 사찰 그림에서 번지듯 푸르게 그린 구름처럼, 하늘을 캔버스 삼아 푸른 그물이 퍼지듯이 보이도록 디자인했다”고 말했다. 또 작품설치를 위해 한국 전통 수공예 기법을 연구하기도 했다.
에힐만 작가는 하버드대에서 환경학을 공부한 뒤 예술가의 길을 택했다. 1997년부터 그물을 응용한 작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당시 인도 여행을 갔던 그는 어부들이 그물을 해변에서 말리는 광경을 보고, 부드럽게 움직이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물의 속성에 매료됐다. 환경을 주제로, 환경에 따라 변화하고 반응하는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그에게 딱 알맞는 소재였다. 에힐만은 "예술은 이런 변화를 포용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며 “사람들이 내 작품을 통해 바람과 햇빛 등 변화하는 것들과 관계를 맺고 상호 작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작품이 그물 형태라 쉬워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하늘거리는 느낌을 살리기 위해 그가 그물 만드는 데 쓰는 소재는 초경량 섬유재질. 하지만 워낙 큰 대형 설치 작품이다보니 무게만도 500㎏ 넘기는 건 예삿일이다. 그래서 설치 작업 때마다 건축가, 구조공학가, 조경가, 재료공학가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한다.
코로나19시대 '어스타임 코리아' 작업은 어떻게 했을까. 서로간에 방문이 어려우니 어쩔 수 없이 국내 설치팀과 수십차례에 걸친 원격회의를 통해 작업해야 했다. 에힐만 작가는 그래서 이번 한국 작품 설치가 특별히 고맙다 했다. "공공예술은 작가만의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드는 사람들과 이를 즐기는 사람들 모두 참여해 완성하는 데서 의의가 있어요. 코로나19로 비록 직접 만날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예술 작품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에힐만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보는 관객들의 기쁨도 푸르게 일렁이길 기원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