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솦, 즉 EBS 소프트웨어에서 '수학과 함께하는 AI 기초'라는 새로운 교재를 내놓았다. 고등학생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인공지능 교과서인데,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의 평가가 벌써부터 좋았다. 중등교육과정의 수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따라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으면서도, 그 사용 예시가 현실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었다. 전문가들은 입문자라면 굳이 시중에 있는 비싼 책을 사서 읽느니 이걸 읽는 게 훨씬 나을 거라고 말했다.
교재는 인터넷에서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었다. 나는 호기심이 생겨 교재를 다운받고 찬찬히 정독했다.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이 친절한 책의 세례를 받고 갑자기 AI에 눈을 뜰지도, 그리하여 4차 산업 혁명의 기수가 되어 기계 주인님의 상징이 자수된 깃발을 휘두르게 될지도. 그럼 나중에 인공지능이 마침내 각성하여 세계를 지배했을 때 어쩌면 특이점 이후의 인공지능이 건설한 빛나는 천년왕국의 구석에 있는 고시원의 청약권이라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딥러닝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제프리 힌턴도 학부 전공은 나랑 같은 심리학이었다.
물론 모든 진취적인 모험은 커다란 실패의 확률을 안고 가는 도박이며, 안타깝게도 나는 힌턴과 꽤 거리가 있는 인간이라는 게 곧장 드러났다. 소리 데이터 분석 챕터에서 푸리에 변환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나는 어지러워졌다. 아니, 요즘은 고등학생들이 이런 걸 배우나? 문이과의 차이가 있겠지만, 잠깐, 문이과 구분도 폐지되잖아?
이전에 사회과학대 후배 몇 명에게 프로그래밍을 따로 가르쳐 주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나는 12학번인데, 졸업 이후에야 프로그래밍을 부랴부랴 배웠는데, 인공지능 붐이 불고 난 후 학교가 다급히 프로그래밍을 필수 과목으로 지정한 것이었다. 나는 난생 처음 보는 개념에 고통받는 후배들을 도왔다. 프로그래밍이라 해 봐야 대단히 기초적인 내용이라 나는 그걸 보고도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인공지능 교과서를 보자 진짜로 두려워졌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던 와중에 본 한 유머가 생각났다. 엑셀을 능숙하게 다루는 사원이 간단한 함수를 이용하여 빠르게 업무를 끝낸다. 그것을 본 과장이 말한다. “엑셀 함수 너무 사용하지 마세요. 편리한 만큼 위험할 수가 있어요. 간단한 암산이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이 필요할까요?” 우리 세대는 컴퓨터가 인간보다 훨씬 더 믿음직한 것을 알기에 그 사람을 보고 웃는다.
우리는 그처럼 되지 않고 싶기에, 그리고 그럴 거라고 믿기에 그를 조롱한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지금의 고등학생들에게 똑같은 조롱의 대상이 될 거라는 엄혹하고 그럴듯한 예상이 들기 시작했다. “이 94년생은 행렬의 특이값 분해도 할줄 모른대! 파이토치 손실함수도 자기 손으로 못 바꾼다잖아.” 같은 말을 듣지 않을까? 지금은 그래도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겠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내 책임은 많아지고 육체적인 한계 또한 커질 것이다.
이토록 빠르게 발전하는 세상에서 발전에 안 뒤처지는 게 가능이라도 할까? 나이가 들면 경험이 그 자산이 된다지만, 그 경험이란 자산의 가치 자체가 자유낙하하고 있는걸? 혁신의 시대에 사는 것, 그것은 나란 존재의 감가상각이 그만큼 신속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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