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들어 추진하던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이 가시화했다. 정부는 28일 입법예고를 한 뒤 올해 내 국회 통과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재계 및 시민사회단체 등에서는 소송남발로 인한 기업활동 우려 등을 제기하고 있어 입법과정에 상당한 진통도 예상된다.
법무부가 23일 입법예고한 집단소송제 및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핵심은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다른 피해자까지 한번에 구제받도록 한다는 것이다. 특히 실손해액의 5배까지 배상하도록 함으로써 피해자에는 더 큰 배상이, 문제의 기업에는 더 큰 책임이 부과된다.
2014년 발생한 카드사 고객정보 유출사태에 대입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대법원은 카드사들의 책임을 인정하고 원고들에게 각 10만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물론 배상 대상은 공동소송을 제기한 원고들에게만 배상이 한정됐다. 소송을 제기한 이들이 약 1만명으로 추산되는 점을 감안하면 카드사들의 배상액은 10억여원에 그쳤을 것으로 보인다. 유출된 정보가 약 1억건으로 당시 경제활동 인구의 대부분이었던 데 반해 피해구제 대상과 총 배상액은 턱없이 적었던 셈이다. 카드사들은 지난 9월 형사사건에서도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으로 유죄를 확정받았는데, 벌금은 1,000만~1,500만원에 불과했다.
만약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도입됐더라면 카드사 정보유출 사태에도 제대로 된 배상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법무부의 설명이다. 집단소송을 승소하면 원고로 참여한 이들뿐만 아니라, 정보가 유출된 모든 피해자들이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적용되면 배상액도 최대 50만원까지 가능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만 배상이 늦어지고 있는 폭스바겐 사태도 집단소송제 등이 도입되면 달라질 주요 사례로 언급된다. 폭스바겐은 이른바 '디젤 게이트' 보상금으로 미국에서는 1인당 최대 1,100만 원을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 법안이 없던 독일의 경우 2018년 독일의 폭스바겐 집단소송 특별법을 통해 손해배상이 이뤄졌다. 하지만 한국 고객에게 이뤄진 배상은 100만 원짜리 쿠폰 제공이 전부다. 폭스바겐의 미온적 대응은 우리나라에 집단소송제나 징벌적손해배상제가 미비하기 때문이라는 게 법무부의 분석이다.
이밖에 가습기 살균제, 라돈 침대 등 집단 피해 사례에 대한 효율적 구제도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우리나라의 집단소송은 주가조작이나 허위공시 등 증권 분야에서만 집단소송이 가능했다. 경제적 손해와 비교할 수 없는 건강 및 생명에 피해를 입은 이들에 대해서는 구제 제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것이다. 시민사회에서도 이윤 획득을 위해 자행되는 기업의 악의적 위법행위에 대한 국가 차원의 예방이나 규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다는 지적을 줄곧 제기했다.
법무부는 집단소송제 및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통해 피해자들에 대한 효율적 구제와 피해 예방, 기업의 책임경영 향상을 유도한다는 계획이다. 집단소송법은 법 시행 전 발생한 사안에 대해서도 소급 적용이 가능하며, 징벌적손해배상은 법 시행 후 행위로 인한 손해부터 적용된다. 법무부 관계자는 "집단적 피해 발생 가능성이 사회 구조적으로 존재하는데 반해, 집단적 피해 발생시 소송부담이나 실익 등으로 개별 피해자가 실제 피해 회복을 꾀할 수 없는 제도적·현실적 한계가 존재했다"며 "제도 정비로 공정한 경제 환경과 지속 가능한 혁신성장 기반이 함께 조성될 것이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재계 등의 반발이다. 이번 정부 들어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강력 추진했지만 그 동안 속도를 내지 못했던 것도 소송남발로 인해 기업활동이 위축된다는 재계의 반발 때문이었다. 실제 집단소송과 징벌적 손해배상이 제도화된 미국에서는 변호사들이 집단소송을 부추기고 기업을 압박하면서 논란이 된 사례가 적지 않다.
징벌적 손해배상제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언론사가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대상이 될 경우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크다는 우려도 나온다. 특히 차기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각 진영이 언론 보도를 ‘가짜뉴스’로 대응할 경우 언론자유에 재갈을 물리는 역효과가 나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