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주간 이어진 反정부 시위에도 거리 깨끗
여성들 꽃 들고 뜨개질하며 평화시위 주도
"독재정권 굴복시키기엔 너무 온건" 지적도
지난달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 도심에 10만명이 넘는 군중이 운집한 날, 에카테리나 다네이코(25)의 시선은 포화 상태의 공공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반(反)정부 시위 열기에 날씨마저 무더워 집회 참가자들은 저마다 물병을 들었지만, 버릴 곳을 찾지 못해 난감해하고 있었다. 다네이코는 가까운 슈퍼마켓에서 커다란 봉투를 사가지고 와 쓰레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쓰레기를 한 가득 주워 차에 싣고 집으로 향하는 사람은 그 만이 아니었다. 다네이코는 “둘러보니많은 시민들이 나와 똑같이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치러진 대선 결과에 불복해 7주 넘게 연일 정권 퇴진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벨라루스의 집회 풍경이다. 격앙된 민심에 무질서가 난무할 법도 하지만, 거리는 여느 때처럼 깨끗하게 정돈돼 있다고 한다. 집회가 끝난 뒤 참가자들 스스로 쓰레기를 치우는 건 기본. 공공벤치에 올라가 구호를 외치기 전 신발을 벗는 장면도 종종 목격된다. 겉모습만 보면 2016년 수백만개의 불꽃이 타올랐던 광화문 촛불시위를 연상케 한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22일(현지시간) “만약 도로 교통이 차단되지 않았다면 길을 따라 행진하는 수천 명의 군중들은 빨간색 신호등에 일제히 정지했을 것”이라며 벨라루스의 준법 시위를 칭찬했다.
평화시위를 여성들이 주도하고 있는 점도 눈에 띈다. 상대적으로 경찰에 폭행당할 위험이 적어서다. 시위 참가 여성들은 비폭력을 강조하기 위해 흰색 옷을 입고 거리로 나서고, 진압 경찰들에게 꽃을 나눠주거나 흔드는 이도 많다. 일부 여성은 경찰이 다가오면 옛 벨라루스 국기 색깔인 흰색과 빨간색 실을 꺼내 즉석에서 뜨개질을 하기도 한다. 서로 폭력을 쓰지 말자는 무언의 항의 표시다. 한 여성 시위자는 신문에 “우리는 힘으로 힘에 대항하지 않는다”며 “국가 폭력에 맞서려면 더욱 정중해져야 한다”고 했다.
‘벨라루스 스타일’ 평화집회가 오랜 독재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현지 언론인 한나 리우바코바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수년간 수도의 청결함을 홍보해 새로운 문화 현상으로 자리잡았다며, 지난해 러시아와의 국가통합을 반대하는 시위에서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사진을 찢은 시위자들이 집회가 끝난 뒤 이를 하나하나 수거해 쓰레기통에 넣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벨라루스인들은 질서를 중시하고 자제력이 강하며 매우 조직적이다. 독재 정권 하에서 단련된 특징이냐고 묻는다면 날카로운 질문”이라고 WP에 말했다.
배경을 떠나 차분하면서도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는 시위 전략은 여러 긍정적 효과를 내고 있다. 우선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평화적 목소리 앞에 시위대를 극단적 ‘범죄자’나 ‘실업자’로 몰아세우려는 루카셴코 대통령의 주장은 공허한 외침으로 전락했다. 충돌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러시아의 개입 명분도 설 자리를 잃게 됐다. 러시아 정부는 결국 14일 벨라루스 시위 격화에 대비해 국경 인근에 배치한 군 병력을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내부적으로는 시민들의 연대의식을 한층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경찰이 평화집회를 수류탄과 고무탄 등으로 거칠게 해산하는 모습을 보고 분노한 시민들이 너도나도 시위대에 가세한 것이다.
물론 한계도 엿보인다. 거센 퇴진 요구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루카셴코 대통령의 버티기에 시위대 내부에서 전략 수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다. 미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은 지난달 22일 “벨라루스 반정부 시위는 성공하기에 너무 온건할지 모른다”는 논평을 내놨다. 루카셴코 정권이 최근 권위를 회복하면서 러시아에 원조를 요청하고, 국영방송을 통해 편파ㆍ왜곡 보도를 쏟아내는 등 본격적인 반격에 나선만큼 시위대도 저항 수위를 높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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