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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자는 안 되나요?” 268년 된 남자 학교를 바꾼 당당한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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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자는 안 되나요?” 268년 된 남자 학교를 바꾼 당당한 외침

입력
2020.09.24 11:0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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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대가 개교 이래 처음 남녀공학으로 전환한 1969년 입학한 신입 여학생이 올드 캠퍼스를 나홀로 걷고 있다. 출처 예일대 도서관 기록 보관소, 항해 제공

예일대가 개교 이래 처음 남녀공학으로 전환한 1969년 입학한 신입 여학생이 올드 캠퍼스를 나홀로 걷고 있다. 출처 예일대 도서관 기록 보관소, 항해 제공


‘1701년 문을 연 이 곳은 늘 남성에게만 열린 공간이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학생들은 남성만 있는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남성만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남성만 있는 기숙사로 돌아왔다. 여성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아내, 어머니, 여자친구, 혹은 비서나 식당 노동자로. 주변부에서 맴돌 뿐. 1968년 이곳엔 여성 종신 교수가 ‘무려’ 두 명 있었다. 반면 남성 종신 교수는 391명이었다.’ 남자의, 남자에, 남자를 위한 대학,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남성만의 성채(城砦)였던 ‘예일대’ 얘기다.

‘예일은 여자가 필요해’는 268년간 꽁꽁 닫혀 있었던 예일대학교가 1969년 남녀공학으로 전환하며 맞이한 첫 여성 입학생들의 분투를 생생하게 그려낸 책이다. 저자 역시 예일대 출신 여성으로 52세에 늦깎이 박사논문을 쓰려다 예일대 첫 여학생들에 대해 떠올렸다.

하지만 어디서도 그녀들의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었고, 42명의 선배들을 일일이 찾아 인터뷰하고 썼다. “세상은 예일대가 여학생 입학을 허용한 결정만 기억하고 있죠. 입학이라는 스위치를 탁 켜자마자, 남학생뿐인 마을이 여학생을 공정하게 대우하는 곳으로 한 순간 변신했다는 듯이. 그 과정에서 여성들이 어떤 일을 겪고 대항해왔는지를 잊은 채 말이죠.”


1970년 2월 예일대 여학생들이 만든 자치기구였던 예일대 자유여성총회가 회의를 열고 있다. 이들은 성비 불균형을 고착화하는 남녀 할당제를 폐지하라고 학교 당국에 촉구했다. 항해 제공

1970년 2월 예일대 여학생들이 만든 자치기구였던 예일대 자유여성총회가 회의를 열고 있다. 이들은 성비 불균형을 고착화하는 남녀 할당제를 폐지하라고 학교 당국에 촉구했다. 항해 제공


지금이야 놀랍지만, 1960년대 여성을 거부한 대학은 예일대만이 아녔다. 우리가 아는 미국의 명문대 이름은 다 포함됐다. 당시 예일대 총장이었던 킹먼 브루스터 주니어 역시 여성이 예일대에 다녀야 할 이유가 없다고 봤다. 그에게 예일대는 “국가 지도자를 배양하는 훈련소”였고, “여성은 국가지도자가 될 수 없는데 왜 예일대를 다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태세를 바꾼 건 순전히 ‘마케팅’ 때문이었다. 당장 예일대는 경쟁학교였던 하버드와 프린스턴대에 우수한 남학생들을 빼앗기고 있었다. “여학생을 만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하버드는 당시 근처 래드클리프 여대 학생에게 수강 기회를 주고 있었고, 프린스턴대는 남녀공학 전환을 준비하고 있던 차였다. 예일대가 여학생에게 갑자기 문호를 개방한 건 순전히 남학생을 위해서였던 것. 남녀평등이나 공정 같은 최소한의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로지 “현 상태를 최대한 깨뜨리지 않으며” 여학생을 받아들이는 게 목표였다.

결국 성벽을 깨뜨리는 건 예일대에 처음 발을 디딘 여학생들의 몫이 됐다. 남녀공학 전환의 총책임자였지만, 여성이란 이유로 직책은 총장의 ‘특임비서’였던 엘가 와서먼도 이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기개 좋은 강인한 여학생”을 선발 기준으로 세웠다. 소심한 학생들은 절대 버텨낼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1972년 11월 예일대 여자 필드하키팀이 프린스턴대와 맞붙었다. 예일대는 여학생들의 팀 운동을 불허했고, 학교 차원의 지원은 일절 없었다. 항해 제공

1972년 11월 예일대 여자 필드하키팀이 프린스턴대와 맞붙었다. 예일대는 여학생들의 팀 운동을 불허했고, 학교 차원의 지원은 일절 없었다. 항해 제공


그렇게 첫해 선발된 인원은 575명. 언론은 이들을 ‘슈퍼우먼’이라 부르며 치켜세웠다. 당시 여학생들 성적이 남학생들보다 뛰어났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예일대에서 이들은 할 수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았다. 고적대원이 될 수 없었고, 남성들만 입장하는 식당과 체육관은 발도 들이지 못했고, 학내 유명합창단은 “여자가 끼면 소리 질이 떨어진다”고 거부당했다.

여학생들을 더 힘들게 한 건, ‘고립’이었다. 남녀공학이었지만 입학생의 87%가 남학생이었고 남녀 성비는 7대 1이었다. 학교는 여학생들을 그룹으로 나눠 12개의 기숙사에 분리시켰다. 여학생들은 늘 감시 아닌 감시에 시달려야만 했다. “여성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여자치고 나쁘지 않네” 학교생활 내내 여학생들은 자신이 아니라 여성 전체를 대표해야만 했다. 성폭행을 당하고도 신고하는 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고민하다, 학교를 그만두는 여학생도 여럿이었다.


1972년 예일대 여학생들이 주축이 돼 만들어진 뉴헤이븐 여성해방 록밴드 멤버들이 한 손을 치켜드는 포즈는 취하고 있다. 항해 제공

1972년 예일대 여학생들이 주축이 돼 만들어진 뉴헤이븐 여성해방 록밴드 멤버들이 한 손을 치켜드는 포즈는 취하고 있다. 항해 제공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여학생들은 ‘시스터 후드’ 등 각종 자치단체를 꾸려 상식을 벗어난 후진적인 관행과 제도들을 하나씩 바꿔 나갔다. 가장 큰 목표는 역시 여학생들의 머릿수를 늘리는 것. 예일대는 남녀공학 전환 이후에도 매년 남성지도자 1,000명을 배출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남학생 1,000명, 여학생 200명만 신입생으로 뽑는 ‘남녀할당제’를 고집했다. 여학생들은 “여성들에게도 질 좋은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대학의 의무”라고 투쟁했고, 결국 예일대는 1972년 지원자의 성별이 입학 결정 요인이 될 수 없다며 할당제를 폐지했다. 그 뒤 5년도 지나지 않아 예일대 입학생 비율은 46%로 2배 늘었다.

‘성희롱’(sexual harassment)이란 표현을 처음 사용한 것도 예일대 여학생들이었다. 1971년 예일대 여학생들이 연방정부에 예일대의 성차별을 고소할 때 이 말을 쓰면서부터 성희롱이란 개념이 공식화 됐다.


예일은 여자가 필요해ㆍ앤 가디너 퍼킨스 지음ㆍ김진원 옮김ㆍ항해 발행ㆍ500쪽ㆍ1만9,000원

예일은 여자가 필요해ㆍ앤 가디너 퍼킨스 지음ㆍ김진원 옮김ㆍ항해 발행ㆍ500쪽ㆍ1만9,000원


예일대에 첫 여학생들이 등장해 남성뿐인 교정을 헤매던 이후로 50년이 흘렀다. 당시 여학생들이 외치던 세상은 만들어졌을까. 예일대 여학생 비율은 49% 가까이 되지만, 종신교수진에서 여성 비율은 26%에 불과하다. 예일대 총장은 여성이나 유색인종이 선출된 적이 없다. 예일대 출신 남학생이 1달러를 벌 때 같은 학위를 지닌 여학생은 74센트를 받는다.

“예일대학과 그 밖에서 치르는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1972년 내내 예일대에서 산이 움직였듯, 언젠가 다시 산은 움직일 것이다.” 2020년 지금 이순간, 예일대에서도, 예일대 밖에서도 50년 전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책 제목처럼, 예일에 그리고 세상에 여성은 여전히 더 필요하다.

강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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