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1년 문을 연 이 곳은 늘 남성에게만 열린 공간이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학생들은 남성만 있는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남성만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남성만 있는 기숙사로 돌아왔다. 여성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아내, 어머니, 여자친구, 혹은 비서나 식당 노동자로. 주변부에서 맴돌 뿐. 1968년 이곳엔 여성 종신 교수가 ‘무려’ 두 명 있었다. 반면 남성 종신 교수는 391명이었다.’ 남자의, 남자에, 남자를 위한 대학,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남성만의 성채(城砦)였던 ‘예일대’ 얘기다.
‘예일은 여자가 필요해’는 268년간 꽁꽁 닫혀 있었던 예일대학교가 1969년 남녀공학으로 전환하며 맞이한 첫 여성 입학생들의 분투를 생생하게 그려낸 책이다. 저자 역시 예일대 출신 여성으로 52세에 늦깎이 박사논문을 쓰려다 예일대 첫 여학생들에 대해 떠올렸다.
하지만 어디서도 그녀들의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었고, 42명의 선배들을 일일이 찾아 인터뷰하고 썼다. “세상은 예일대가 여학생 입학을 허용한 결정만 기억하고 있죠. 입학이라는 스위치를 탁 켜자마자, 남학생뿐인 마을이 여학생을 공정하게 대우하는 곳으로 한 순간 변신했다는 듯이. 그 과정에서 여성들이 어떤 일을 겪고 대항해왔는지를 잊은 채 말이죠.”
지금이야 놀랍지만, 1960년대 여성을 거부한 대학은 예일대만이 아녔다. 우리가 아는 미국의 명문대 이름은 다 포함됐다. 당시 예일대 총장이었던 킹먼 브루스터 주니어 역시 여성이 예일대에 다녀야 할 이유가 없다고 봤다. 그에게 예일대는 “국가 지도자를 배양하는 훈련소”였고, “여성은 국가지도자가 될 수 없는데 왜 예일대를 다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태세를 바꾼 건 순전히 ‘마케팅’ 때문이었다. 당장 예일대는 경쟁학교였던 하버드와 프린스턴대에 우수한 남학생들을 빼앗기고 있었다. “여학생을 만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하버드는 당시 근처 래드클리프 여대 학생에게 수강 기회를 주고 있었고, 프린스턴대는 남녀공학 전환을 준비하고 있던 차였다. 예일대가 여학생에게 갑자기 문호를 개방한 건 순전히 남학생을 위해서였던 것. 남녀평등이나 공정 같은 최소한의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로지 “현 상태를 최대한 깨뜨리지 않으며” 여학생을 받아들이는 게 목표였다.
결국 성벽을 깨뜨리는 건 예일대에 처음 발을 디딘 여학생들의 몫이 됐다. 남녀공학 전환의 총책임자였지만, 여성이란 이유로 직책은 총장의 ‘특임비서’였던 엘가 와서먼도 이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기개 좋은 강인한 여학생”을 선발 기준으로 세웠다. 소심한 학생들은 절대 버텨낼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렇게 첫해 선발된 인원은 575명. 언론은 이들을 ‘슈퍼우먼’이라 부르며 치켜세웠다. 당시 여학생들 성적이 남학생들보다 뛰어났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예일대에서 이들은 할 수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았다. 고적대원이 될 수 없었고, 남성들만 입장하는 식당과 체육관은 발도 들이지 못했고, 학내 유명합창단은 “여자가 끼면 소리 질이 떨어진다”고 거부당했다.
여학생들을 더 힘들게 한 건, ‘고립’이었다. 남녀공학이었지만 입학생의 87%가 남학생이었고 남녀 성비는 7대 1이었다. 학교는 여학생들을 그룹으로 나눠 12개의 기숙사에 분리시켰다. 여학생들은 늘 감시 아닌 감시에 시달려야만 했다. “여성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여자치고 나쁘지 않네” 학교생활 내내 여학생들은 자신이 아니라 여성 전체를 대표해야만 했다. 성폭행을 당하고도 신고하는 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고민하다, 학교를 그만두는 여학생도 여럿이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여학생들은 ‘시스터 후드’ 등 각종 자치단체를 꾸려 상식을 벗어난 후진적인 관행과 제도들을 하나씩 바꿔 나갔다. 가장 큰 목표는 역시 여학생들의 머릿수를 늘리는 것. 예일대는 남녀공학 전환 이후에도 매년 남성지도자 1,000명을 배출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남학생 1,000명, 여학생 200명만 신입생으로 뽑는 ‘남녀할당제’를 고집했다. 여학생들은 “여성들에게도 질 좋은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대학의 의무”라고 투쟁했고, 결국 예일대는 1972년 지원자의 성별이 입학 결정 요인이 될 수 없다며 할당제를 폐지했다. 그 뒤 5년도 지나지 않아 예일대 입학생 비율은 46%로 2배 늘었다.
‘성희롱’(sexual harassment)이란 표현을 처음 사용한 것도 예일대 여학생들이었다. 1971년 예일대 여학생들이 연방정부에 예일대의 성차별을 고소할 때 이 말을 쓰면서부터 성희롱이란 개념이 공식화 됐다.
예일대에 첫 여학생들이 등장해 남성뿐인 교정을 헤매던 이후로 50년이 흘렀다. 당시 여학생들이 외치던 세상은 만들어졌을까. 예일대 여학생 비율은 49% 가까이 되지만, 종신교수진에서 여성 비율은 26%에 불과하다. 예일대 총장은 여성이나 유색인종이 선출된 적이 없다. 예일대 출신 남학생이 1달러를 벌 때 같은 학위를 지닌 여학생은 74센트를 받는다.
“예일대학과 그 밖에서 치르는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1972년 내내 예일대에서 산이 움직였듯, 언젠가 다시 산은 움직일 것이다.” 2020년 지금 이순간, 예일대에서도, 예일대 밖에서도 50년 전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책 제목처럼, 예일에 그리고 세상에 여성은 여전히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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