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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가장 외로운 가을

입력
2020.09.22 22: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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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을 수 없다. 하지만 부모의 마음이라고 내 마음과 크게 다를까. 2020년 가을, 코로나 시대의 역설적 페이소스에 가슴이 먹먹하다. 뉴스1

웃을 수 없다. 하지만 부모의 마음이라고 내 마음과 크게 다를까. 2020년 가을, 코로나 시대의 역설적 페이소스에 가슴이 먹먹하다. 뉴스1


마스크로 코와 입을 막고 있어도 미상불 가을이 오긴 왔나 보다. 콧등에 스치는 바람의 점성이 예사롭지 않다. 이부자리를 말리러 옥상에 올라가니 하늘은 높고 푸르다. 빨랫줄엔 성급한 고추잠자리 한 놈이 앉아 있다.

‘주여 지난여름은 위대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힘들게 헤쳐 왔다. 아홉 달째 발톱을 감추지 않는 이놈의 바이러스 말고도 54일이라는 역대 최장의 장마와 두 번의 태풍이 모두를 할퀴었다.

이 난국에 어찌 추정(秋情)을 논하랴마는, 그래도 가을은 가을인 걸 어쩌랴.

가을은 본디 요란하게 오지 않는다. 참선을 마치고 하산하는 수도승처럼 조용히 의젓하게 아무 일 없다는 듯 왔다. 이제는 익히고(가을 ‘秋’는 벼에 불이 붙은 모양이다), 발효하고, 채우고, 그러다 떨구고 마침내는 다 비운 채 긴 침묵의 시간으로 떠날 것이다.

2020년 초유의 가을을 맞는다. 이 가을은 모두의 생애에서 가장 외로운 가을로 일기장에 남을 것이다. 나가도 엉덩이 붙일 곳이 없다. 지하철역 구내 쉼터도, 익숙했던 공간의 벤치들도 어느 틈엔가 자취를 감추었다. 광장도 사라졌다. 더는 함성과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열 재고 QR 코드 찍고 들어가도 멀찌감치 떨어져 앉는다. 집 나간 며느리는 아니어도 고소한 전어구이집을 침 흘리며 지나쳐야 한다. 초등학교 운동회의 함성도, 시골 장터의 노래자랑도, 지자체의 요란한 축제들도 없을 것이다. 봄에는 유채꽃을 갈아엎더니, 저 하늘하늘한 코스모스를, 백설이 애애한 메밀꽃을 어찌 하랴.

그런데 사실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가을은 외로웠다. 가을은 어차피 외로움과 어깨동무하고 가는 거다. 아니 인생은 원래가 외로운 거다. 열쇠구멍 사이로 소리 없이 빠져나가는 연기 같은 것이다.

재작년에 영국이 세계 최초로 외로움부장관(Minister for Loneliness)이라는 걸 신설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백성의 외로움을 국가가 관리하고 덜어주겠다는 것이다. 카페에 외로운 사람이 앉으면 누구라도 다가가서 말을 걸어주는 ‘수다 테이블’도 만들었다. 코로나 시대에 그 테이블은 남아 있을까. 궁금해서 찾아보니 최근 영국의 한 신문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영국 국민은 외롭다’.

외로움을 풀어줄 사람은 없다. 오롯이 자신의 숙제다. 그건 과오도 벌도 아니다. 살아 있는 자만 갈비뼈도 옆구리도 시린 법이다. 혼자이면 외롭고 둘이면 그리운 법이다. 힘이 들 때/더 힘내면/더 힘들다(단편시인 하상욱).

그렇게 이 가을을 버틴다.

나는 가정을 이룬 후 처음으로 고향 열차에 몸을 싣지 않는다. 어머니는 세 번이나 전화하셨다. “애비야, 이번에는 안 내려와도 된다. 내년 설에나 오거라.”

어머니 죄송합니다, 선물은 택배로 봉투는 통장으로 부치겠습니다. 성묘는 대행업체가 알아서 잘해 줄 거고요, 아버지한테는 온라인으로 절할게요. 총리님이 자기 팔아서 불효자식 되라 합니다.

내 어머니는 정말 아들딸이 손주들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걸까. 충청도 어느 시골에 나붙은 현수막 ‘불효자는 옵니다’를 봤다. 그 기발한 패러디에 앞서 머리와 가슴 사이에서 어찌할 바 모르는 우리들의 마음부터 읽힌다. 아, 코로나 시대의 역설적 페이소스. 가을에 더 센 놈이 올지 모른다는 정은경 질병관리청장님의 과학적 전망이 진정 오보이기를 기도하면서.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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