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수다의 효능

입력
2020.09.18 22:00
23면
0 0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즐겁다. 꿔준 돈을 못 받거나 얼굴 붉히며 싸움박질했던 대상이 아닌 한 말이다. 지난 주말에 인왕산 둘레길을 걸었다. 내 집 뒤뜰처럼 익숙한 곳이다 보니 사람 없는 샛길로 빠졌다가 돌아오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고, 그 사이 옷은 땀에 흠뻑 젖었다.

두 시간쯤 산속을 누비다가 서촌길로 접어드는데 반가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빌라 입구에서 재활용 쓰레기를 분리하고 계시는 그분은 이곳 1층에 사는 어른이었다. 달려가 인사하며 할머니가 정리하던 재활용 쓰레기들을 손에 쥐었다. 못 만난 사이 연로한 기색이 역력한 그이가 몇 초쯤 내 쪽을 탐색했다. 마스크에 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저 201호에 살던 사람이에요.” 그 말과 동시에 할머니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거의 울먹이는 소리로 그이가 말했다. “세상에,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있나. 저 아래에 있던 회사까지 다른 데로 옮겼다는 소식 들은 이후에는 영 못 보게 된 줄로만 알았어.”

30대 후반부터 40대 중반까지, 나는 이 빌라에 세 들어 살았다. 10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이었다. 여기에 살며 할머니와 나는 제법 많은 걸 함께했었다. 네 평 남짓한 화단에 채소를 심고, 보름에 한 번씩 계단 물청소를 하고,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에는 집 앞부터 저 아래 버스정류장까지 이어지는 200m 남짓한 눈길을 같이 쓸었다. 그 많은 것 중 제일 즐거웠던 추억을 꼽으라면, 단연 화단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아 지저분하고 교양 없는 입주자들을 대상으로 호박씨를 까는 일이었다. 특히 우리가 죽이 착착 맞아서 흉을 본 대상은 할머니 바로 윗집에 사는 202호 여성이었다. 그 젊은 여성은 발걸음이 유난히 씩씩한 데다 고성능 스피커로 늦은 밤까지 음악을 틀어대는 통에 혼자 조용히 살던 할머니를 노이로제에 시달리게 했다. 무슨 시민단체에서 일한다던 202호 입주자는 현관문을 마주 대고 사는 나에게도 눈엣가시였다. 음식물 쓰레기를 문밖에다 내놓는 것은 예사고 시켜 먹은 배달음식 그릇을 아무렇게나 방치하는 바람에 찌든 기름과 양념 냄새가 우리 집까지 스며들기 일쑤였다. 그러니 할머니가 ‘싹수없는 202호’를 전후좌우 시원하게 돌려 까줄 때는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이자 영혼의 짝을 잃은 후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 고문과도 같은 적막을 홀로 견디고 있다’는 광고를 내서 주위에 도움을 청한 영국 노인 윌리엄스. 영국 메트로 온라인판 캡처

‘사랑하는 아내이자 영혼의 짝을 잃은 후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 고문과도 같은 적막을 홀로 견디고 있다’는 광고를 내서 주위에 도움을 청한 영국 노인 윌리엄스. 영국 메트로 온라인판 캡처


함께 작업하다 보니 쓰레기 분리는 금세 끝났다. 작별인사를 하려는데 할머니가 당신 집에 가서 국수라도 말아먹자며 나를 잡았다. 잠시 혹했지만 땀에 젖은 옷에다 동행이 있었다. 어수선한 시절도 마음에 걸렸다. 다시 뵙자 말하고 돌아서는 내 옆에서 친구가 속삭였다. “근데 저 할머니 눈빛 봤어? 꼭 먼 길 떠나는 자식 배웅하는 거 같어.” 무심하게 흘렸던 친구의 말을 어제 신문을 보다 떠올렸다. ‘사랑하는 아내이자 영혼의 짝을 잃은 후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 고문과도 같은 적막을 홀로 견디고 있다’는 광고를 내서 주위에 도움을 청한 영국 노인 윌리엄스의 기사였다. 은퇴한 물리학자인 그가 내 이웃이라면 틈나는 대로 놀러 가 물리학 얘기를 청할 텐데 하는 생각과 동시에 할머니와 떨었던 수다가 못 견디게 그리워졌다. 아마 그날 그 어른도 지금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 거다. 주말에 과일이라도 사 들고 할머니에게 놀러 가야겠다. 거기 화단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아 조곤조곤 수다 보따리를 풀어야겠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