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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누가 더 위대한 예술가일까?

입력
2020.09.17 14:43
수정
2020.09.17 17:40
25면
0 0
김선지
김선지작가

- 서로 싫어했던 두 거장의 세기의 벽화 대결


미술사의 라이벌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미술사의 라이벌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는 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많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예술가들일 것이다. 예술마저도 스포츠 게임처럼 승자를 결정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둘 중 누가 더 훌륭한 예술가일까 하는 의문을 품기도 한다. 16세기 사람들도 그것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1504년 피렌체 시 당국은 베키오 궁 대회의실 벽화 작업을 두 사람에게 동시에 의뢰해 경쟁을 붙였다. 500여 년 전, 두 거장의 세기의 대결에서 승자는 과연 누구였을까?

시 당국은 시민들의 애국심과 자부심을 높이기 위해 피렌체 역사에서 중요한 전투 두 개를 선정해,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던 그들에게 같은 방의 맞은편 벽면을 각각 장식하도록 했다. 레오나르도에게는 앙기아리 전투, 미켈란젤로에게는 카시나 전투가 맡겨졌다. 유럽 전역에서 확고한 명성을 얻은 52세의 레오나르도와 당시 피에타와 다비드를 제작해 떠오르는 샛별로 등장한 29세의 미켈란젤로가 대규모 벽화 프로젝트에서 경쟁하게 되었을 때, 둘 다 적잖은 심리적 압박을 느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카시니 전투, 바스티아노 다 상갈로의 모사작

미켈란젤로의 카시니 전투, 바스티아노 다 상갈로의 모사작


미켈란젤로는 전투 장면 대신 근육질 남성들이 아르노 강에서 목욕하다가 적군의 침입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옷을 입는 순간을 그렸다. 똑바로 선 자세, 앉은 자세, 구부리거나 엎드린 자세, 엉거주춤한 자세 등 다양한 포즈의 인물들을 통해, 정밀한 해부학적 지식과 능숙한 명암 묘사가 표현되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용감한 군인들이 승리를 거둔다는 영광스러운 서사시를 기대한 시 당국의 바람을 저버리고 인체의 해부학적 탐구에 더 몰두했다.


레오나르도의 앙기아리 전투, 피터 폴 루벤스의 모사작

레오나르도의 앙기아리 전투, 피터 폴 루벤스의 모사작


반면, 체사레 보르자 곁에서 군사 공학자로 일하며,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목격했던 레오나르도는 치열한 전투 장면을 그렸다. 기마병의 사나운 표정과 서로 얽히고설킨 인물과 말의 격렬한 움직임으로 인해 화면에 에너지와 생동감이 넘친다.

스타일도 정반대였다. 미켈란젤로가 인물들을 마치 조각상같이 딱딱하게 그리고 날카롭고 선명한 윤곽선을 사용한 반면, 레오나르도는 스푸마토 기법과 그림자, 부드러운 시각효과 등 섬세한 표현을 보여 준다. 사실 미켈란젤로 자신도 화가보다는 조각가가 자신에게 맞는 옷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여간해서 남을 비난하지 않았던 레오나르도는 미켈란젤로의 근육질 남성들의 몸이 울퉁불퉁한 호두알 같다며 그가 해부학적으로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두 사람은 외모와 성격도 대조적이었다. 레오나르도는 근육질의 몸, 균형 집힌 체격의 빼어난 미남이었고, 성품이 온화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으며, 화려한 패션을 좋아한 멋쟁이였다. 늘 곁에 젊은 미남자들을 두며 동성애를 감추지 않았고, 그다지 종교적이지도 않았으며 세속적 쾌락을 즐겼다. 반면, 땅딸막한 키에 등이 살짝 굽은 볼품없는 체격에다가 동료 조각가에게 맞아 코까지 부러진 미켈란젤로는 평생 외모 콤플렉스를 지니고 살았다. 성격도 괴팍하고 까탈스러워서 툭하면 다투기 일쑤였고, 늘상 입에 불평을 달고 살았으며, 가까이 지내는 친구나 제자들도 없었다. 그는 멋진 옷은커녕 며칠째 갈아입지도 않은 먼지 쌓인 작업복을 입고 장화를 신은 채 잠을 잤다. 음식도 작업하면서 우물거리는 빵 한 조각과 포도주 한 모금이면 충분했고, 신앙심이 독실해 세속적 쾌락에 도무지 관심이 없었던 금욕주의자였다.

르네상스 미술비평가 조르조 바사리에 의하면, 두 사람은 서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은근히 상대방을 얕보았다고 한다. 특히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에 대해 혐오감을 감추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서 시도한 청동 기마상이 실패해 녹여진 후 대포 제작에 사용됐다는 것을 조롱하며 무례한 태도를 보였다. 레오나르도 역시 조각은 우아한 그림에 비해 지저분하고 단순하며 기계적인 작업이므로, 조각가는 화가보다 열등하다고 깔보았다. 사실, 두 사람 모두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천재들이었기 때문에 서로 친밀해지긴 어려웠을 것 같다.

어쨌든 이 대결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항상 새로운 실험을 즐긴 레오나르도는 벽에 잘 밀착되는 유성물감 혼합물을 만들려고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한번은 안료에 왁스를 섞어 만든 물감을 사용했는데 잘 마르질 않아 그만 석탄 화로로 급히 말리려다가 물감이 흘러내리는 바람에 그림을 망치기도 했다. 레오나르도는 이런 식으로 시간을 질질 끌던 차에, 밀라노에서 다른 주문이 들어오자 작업을 포기하고 떠나버렸다. 미켈란젤로 역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초청을 받고 로마로 감으로써 이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완성되지 않은 두 거장의 밑그림은 1512년까지 피렌체에서 전시되었고,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이것들을 보러 몰려들었다. 광분한 얼굴, 뒤틀린 나체들, 복잡한 자세들, 미쳐 날뛰는 말 등이 그려진 그림들은 예술가들에게 미술 학교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1563년, 베키오궁 리모델링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레오나르도의 그림 대신 바사리의 프레스코화가 대회의실 벽을 장식하게 되었고, 미켈란젤로의 벽화 역시 소실되었다. 이제 그들의 그림은 후대 화가들의 모사에 의해서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저러나 이 벽화 대결은 누구의 승리로 끝났을까? 당대 사람들은 그 시대의 최고의 예술가는 미켈란젤로라고 생각했다. 이 벽화 대결 이후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을 그리고 성 베드로 성당,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등을 설계해 최고의 예술가로 인정받은 반면, 항상 한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관심을 돌린 채 작품들을 미완성으로 남긴 레오나르도는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프랑스로 가서 쓸쓸한 여생을 마쳤기 때문이다. 바사리도 미켈란젤로를 가장 완벽한 천재 예술가, 신에 버금가는 예술의 창조자라고 평가했다.

레오나르도는 최고의 예술가이자 과학자, 건축가, 도시 계획가, 엔지니어, 발명가, 무대 세트 디자이너, 음악가로,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자 했고 다방면에 재능을 지닌 ‘만능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미술작품은 미완성으로 남은 것이 많다. 미켈란젤로 역시 화가, 조각가, 건축가, 바티칸 경비대 복장을 만든 디자이너, 피렌체의 요새와 방어 시설을 건설한 엔지니어, 훌륭한 소네트를 쓴 시인으로서, 레오나르도와 같은 ‘르네상스적 인간’이었다. 더구나 그는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세밀하고 끈기 있는 장인 정신으로 수많은 걸작들을 남겼다.

현재까지도 두 사람 중 누가 더 위대한 미술가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분명한 것은 그들 둘 다 서양미술사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서 오늘날까지 사람들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는 예술가라는 것이다. 사실 개성과 작업 방식이 다른 예술가들의 우열을 굳이 가리려 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른다. 여러분은 누구의 손을 들어 주고 싶으신가?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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