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우익이 한반도 평화 무드를 꺼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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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우익이 한반도 평화 무드를 꺼리는 이유

입력
2020.09.17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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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후 체제는 대미종속, "천황=미국" 
신(新) 냉전 유지로 일본 우익 과거 영광 재현하려

지난해 9월 일본을 국빈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부부가 나루히토 일왕 부부가 마련한 환영식에 참석하고 있다. '국체론'의 저자 일본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는 전후 이후 일본의 천황은 사실상 미국이 됐다며 일본의 대미종속 구조를 비판한다. 도쿄 교도=연합뉴스


“내게는 아베 신조 총리가 추진해 온 정책을 계승해야 할 사명이 있다.”

건강 악화로 갑작스레 퇴장한 아베의 뒤를 이어 새롭게 취임한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의 일성이다. ‘리틀 아베’가 되겠다는 분명한 선언. 우경화의 폭주를 멈추고 일본의 새로운 변화를 기대했던 이들 입장에선 맥 빠지는 소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일본의 소장파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白井聡) 교토세이카대 총합인문학과 교수가 보기에 스가의 발언은 전혀 새롭지 않다. 사토시 교수는 “일본은 이미 파멸로 들어섰으며, 아베가 아닌 누가 와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일본의 미래를 어둡게만 내다본다.

40대의 젊은 학자가 자국의 앞날을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내모는 이유는 일본이란 나라의 구조적 한계를 간파해서다. 일본 사람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천황제'가 재앙의 핵심이다.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 천황제를 존속시키는 대가로 일본은 미국의 식민지에 버금가는 종속국가로 전락했고, 그때부터 파국은 시작됐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국체론’은 그 파멸의 역사를 전전 시대와 전후 시대로 정리한 책이다. ‘국체(國體)’란 천황제 중심의 통치체제를 뜻한다.

먼저 패전 이전으로 가보자.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 이후 확립된 천황 중심의 근대 일본 통치 체제는 유럽을 능가하는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정책 추구에 나섰다. 대동아제국이란 망상에 가까운 무모한 야심에 일본 국민은 천황폐하의 충성스러운 적자로 동원됐고,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는 희생자가 됐다. ‘국체’에 대한 반대자, 비판자는 모조리 제거됐다. 일본의 패전은 당시 ‘국체’가 지녔던 반(反) 민주주의와 폐쇄성이 빚어낸 참극이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전후 이후 일본의 천황은 상징적 역할에 머물고 있다. 2019년 11월 15일 나루히토 일왕이 제복을 입고 도쿄 왕궁에서 전날부터 밤샘 행사로 열리는 추수감사 의식 '다이조사이'를 치르고 있다. '다이조사이'는 해마다 치르는 추수 감사제 성격의 궁중 제사 중 일왕이 즉위 후 첫 번째로 행하는 비밀 의식으로 일본 왕실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로 꼽는다. 교도=AP연합뉴스


물론 패전 이후 일본의 천황은 실권 없는 상징적 존재로 고꾸라졌다. 하지만 사라진 건 아녔다. 전후 일본의 역사는 새로운 천황의 등장을 알린다.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일본 천황에게 패전 책임을 묻지 않고 천황의 지위를 인정해줬다. 그 묵인의 조건으로 일본은 미국에 안보와 경제에서 무한 종속되는 길로 들어섰다. 천황과 미국의 은밀한 거래가 성사된 거다. 저자는 대미종속구조의 일부로 설계된 ‘상징 천황제’는 미국의 오랜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도 짚어낸다.

굴복의 대가는 달콤했다. 동서 냉전 시기 미국의 속국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일본의 주가는 치솟았다. 미국의 전폭적 지원으로 일본은 경제 번영과 안정된 안보적 지위를 만끽한다. 하지만 냉전이 사라지고 일본의 지정학적 가치가 사라지자 미국의 비호는 곧 ‘수탈’로 바뀌었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가져온 플라자 합의는 미국이 일본을 때려 뭉갠 대표적 사례다.

그럼에도 일본은 미국의 품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 가보지 않은 미래가 아니라 굴욕적이지만 풍요로웠던 과거를 붙잡고 싶어하는 일본 우익 세력 때문이다. 미일 동맹 체제 아래 번창한 전범세력과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등 각종 '전쟁특수'로 경제성장의 과실을 맛본 우파 내셔널리스트들이 그 주인공. 일본의 우경화와 군국주의 부활을 꿈꿨던 아베 정권은 물론이고, 아베의 계승자를 공언한 스가 정권까지 포함된다.

이들은 대미 종속의 경제적 하부구조는 무너졌지만 안보 종속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또 강력하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일본 우파들이 바라는 건 신(新) 냉전의 도래다. 미중 갈등이 심화하고, 북핵 문제가 교착상태에 빠져드는 건 일본 우파로선 호재인 셈이다. 북미관계가 유연해지는 국면마다 아베 정권이 전전긍긍했던 건 일본이 원하고 그리던 판과는 달라서였다고 저자는 꼬집는다. 천황제를 대가로 얻은 평화주의의 허상이다.


국체론ㆍ시라이 사토시 지음ㆍ한승동 옮김ㆍ메디치 미디어 발행ㆍ336쪽ㆍ1만8,000원


저자는 전전 국체의 형성-부흥-몰락기와 전후 국체의 궤도를 비교하며, 일본이 또 다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고 경고한다. “진주만 공격 당시 일본이 전장에서 승리했음에도 본질적으로 파멸해가고 있었던 것과 같은 의미에서 오늘날 일본 사회 또한 파멸하고 있으며, 전후 국체에 의해 규정 당한 일본 사회의 내재적 한계를 표출하고 있다. 국체라는 관점을 통해 일본의 현실을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는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전후 일본 체제의 본질을 무엇인지, '포스트 아베'인 스가 정권의 일본은 어디로 가는지를 꿰뚫어 보고 싶다면 도움이 되는 책이다. 대미종속으로 일본이 영원한 패전 상태에 머물 것이라고 경고하는 저자의 또 다른 저서 ‘영속패전론’도 같이 읽어보면 좋을 듯 하다.

강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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