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다시 생각하는 흰 가운의 사명감

입력
2020.09.14 04:30
26면
0 0
[서울=뉴시스] 최진석 기자 = 11일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의대협)가 동맹 휴학을 이어가기로 했다. 다만 국가고시 거부를 지속할지 여부는 정해지지 않았다. 사진은 이날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모습. 2020.09.11. myjs@newsis.com

[서울=뉴시스] 최진석 기자 = 11일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의대협)가 동맹 휴학을 이어가기로 했다. 다만 국가고시 거부를 지속할지 여부는 정해지지 않았다. 사진은 이날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모습. 2020.09.11. myjs@newsis.com


전교 1등까지는 아니었지만, 성적이 늘 수위권에 머물렀던 동창의 가족은 모두 의료계 인사들이었다. 막내인 그도 명문의대를 나왔고, 지금은 대학교수로 꽤 이름을 알렸다. 우리 사회가 흔히 이들에게 붙이는 이름은 엘리트다. 뛰어난 자질로 사회를 이끈다고 인정받는 이들. 노블레스 오블리주까지는 아니어도, 공동체가 원하는 사명감의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집단이다.

동창의 페이스북을 보다 연결된 한 전문의의 자기소개 글이 최근 의정갈등을 지켜보던 중 떠올랐다. 그는 태극기 사진을 증명사진처럼 올려놨고, ‘나를 있게 해준 국가에 애국하겠다’는 다짐을 써놨다. 태극기가 태극기 집회로 치환되는 지금 이 글을 봤다면 그는 극우보수 인사로 그려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8년여 전 태극기와 애국이라는 말에는 국민을 향한 사명감의 뉘앙스가 강했다. 오랜 수련을 인내하고 올라선 전문의의 자리에서도 희생을 다짐하는 그의 프로필에는 동료의사들의 수많은 ‘좋아요’가 달려 있었다.

코로나19의 위기에도 20여일 간 병원을 떠난 의사들을 바라보며 여론은 사명감에 대한 질문을 많이 던진 듯하다. “어떻게 엘리트 집단인 의사들이 그럴 수 있나” “하필이면 코로나19로 일손이 부족할 때 파업을 하는가”라는 질책은 다른 직업군보다 의사들에게 좀 더 높은 수준의 사명감을 요구해온 대다수 국민에게는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정부의 ‘4대 의료정책’을 반대하며 개원의들이 먼저 파업 카드를 내밀고, 전공의들이 거리로 나서고, 의대생들마저 국시 거부 투쟁을 벌이기까지 우리 사회가 목격한 이들 엘리트 집단의 사명감은 일반인과 다르지 않았다. 의사들의 직업의식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다. 이들에게 오히려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사명감을 요구해온 건 아니었느냐는 자문이다.

의사들에게 차별화된 사명감을 기대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은 얼마 전 모 의대교수가 언론에 보낸 이메일을 읽으면서 강해졌다. 그의 글은 "대한민국에서 의료는 공공재가 아니다"는 말로 요약됐다. 의사가 되기까지 비용은 개인이 부담하고 의료인 양성을 국가가 책임지지 않는데도 의사에게 공공재 역할을 강요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주장이었다. 제자들을 보호하는 게 진료보다 중요하다고 한 모 의대학장의 말도 같은 맥락이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해서 거머쥔 '의사 타이틀'은 오롯이 개인의 트로피이며, 의료인을 양성한 공은 병원에 있으니 정부와 사회가 이들의 투쟁이 지니는 정당성을 훼손하지 말라는 말이다. 스스로 공공재가 아니라고 말하는 의사들은 그러나 의대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을 막겠다고 주장하면서 집단이익이 아닌 공공을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자기모순이 아닐 수 없다.

언제 깨질지 모를 살얼음 의정합의서를 앞에 두고, 우리 사회는 공익을 사익보다 우선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의사들을 인정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암묵적으로 요구해온 사명감의 족쇄도 풀어줘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에 앞서 분명히 할 게 있다. 의사에게만 열리는 기회의 창도 함께 닫아야 한다. 국시거부 의대생에게만 재응시를 허락한다면, 이들은 높은 수준의 사명감과 공공재라는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특별대우는 특별한 경우에만 허용해야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법이다.














양홍주 부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