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기고] 나는 지금 못마땅한 나 자신에게 대들고 있는 중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기고] 나는 지금 못마땅한 나 자신에게 대들고 있는 중

입력
2020.09.10 22:55
0 0

이진숙 전 '클럽 리' 대표

뭐든 처음부터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르면 해봐야 하고, 달라져야 변하는 거다. 미용사가 프랑스 영화의 여주인공 머리를 권했을 때, 나는 손사래를 쳤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모의 그를 따라한다는 건 당치도 않았으니까. 젊고 발랄하고 깜찍한 헤어스타일을 다시 또 권했을 때, 나는 그냥 맡겨버렸다. 나이가 들어 살이 찌고 무너져버린 거울 속 얼굴을 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놀랄 만큼 달라져 기분전환은 확실했지만, 예쁘지 않은 것까지도 확실했다. 이대로 두어야 할지 망설였지만,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니 두고 보기로 했다. 내 머리 모양이 할 말을 잃게 만드나 보다. 그날 만난 친구는 아무 말도 안 하다가 한참 후에야 "고백하는데, 그날 속으로 무척 놀랐다"고 했다. 남편도 마찬가지. 어떠냐고 묻는데 자꾸 웃기만 했고, 계속 캐물으니 "우리 나이에는 할 수 없는 머리"란다. "그럼, 젊은 애들이 하는 머리냐?"고 물으니, "젊은 애들도 안하는 머리"라네. 둘이 한참 웃었다.

묻지 않았는데도 말하게 만드나 보다. "잘 어울린다" "젊어 보인다" 같은 인사성 발언을 해도 되건만, 애매하게 "괜찮다" "아무나 할 수 없는 머리다"란다. "일본인형 같네요"라는 말은 '인형처럼 예쁘다'가 아니라, '일본인형을 닮았다'는 뜻이다. 남편 친구들도 실실 웃으며 가만히 있지 않는다. 남의 부인에게 "자꾸 보니 귀엽다"고 하지를 않나, "새로운 머리스타일을 관심 있게 보고 있습니다"라며 말을 건다.

딸이 느닷없이 화상통화를 거는 바람에 들통이 났다. 예상대로 딸은 "엄마! 머리!"라고 소리쳤고, "엄마 머리가 괜찮다는 말을 믿으면 안 된다"고, "엄마를 위한 진실어린 조언을 구별하라"면서 흥분했다. 시키지 않았는데도 사진을 찍어 제 오빠에게 보낸다. 아들은 며느리가 옆에 있는데도 "캐릭터 같다"느니 "레고 머리 같다"느니 하면서, 시어머니를 아주 우습게 만든다.

"세상에서 가장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 나다. 이제부터 집중해 생각하자고 해서 바로 생각을 길어 올릴 수도 없다. 그 생각은 자칫 당시 분위기에 휘둘린 감상일 수도 있다. 현실에서는 오히려 '생각'하고 '행동'하기보다 '행동'하면서 '생각'이 따라서 정리되었다." - 임경선, '태도에 관하여'

어쩌다 '행동'을 하게 된 내가 지금 '생각'을 하고 있다면 좀 억지스러운 주장일까? 새로운 내 모습에 당황하면서도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좀 엉뚱하기는 해도 나는 지금 그런 심정이다. 오랫동안 해왔던 단정하고 깔끔한 숏커트가 나 스스로를 지나치게 정확하고 까다로운 사람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나의 전체 모습이 아닐 수도 있는데, 나는 나를 다 알고 있다는 기분에 젖어 나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이제 그런 나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내가 한 행동의 이유도 모른 채, '예쁘지 않다'는 진실을 알고도 미용실로 달려가지 않는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은 오랫동안 해왔던 단정한 머리를 파마머리로 '바꾸고 나니' 인생이 달라졌다고 했다. 사진작가 윤광준은 머리가 빠지면서 모자를 쓰기 시작했고, 어떤 모자가 어울리는지 친구들에게 묻다가, 내가 쓸 모자를 남에게 묻는 자신을 탓했다고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어떤 계기가 필요할 무렵, 얼마 남지 않은 머리로 버티고 있던 즈음,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고 '아예 자신의 손으로 밀어' 빡빡이가 되기로 했다고 했다.

낯설고 생경한 일에는 소심했다. 어색하거나 난감한 상황은 피했다. 겁나는 일에는 몸을 움츠렸고, 두려운 일에는 뒤로 물러났다. 나는 지금 못마땅한 나 자신에게 대들고 있는 거다. 내안의 잠자던 모험심을 끌어내 나를 너그럽게 허용하고 있는 거다. 살면서 마주칠 훨씬 더 큰일들을 대비해 연습을 하고 있는 거다. 언제나 예쁘게 보이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실험 중이고, 내 모습을 보고 웃는 사람들과 함께 웃을 수 있는 '여유'를 실험 중이다.


이진숙 전 '클럽 리' 대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