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네버 해브 아이 에버'
편집자주
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칼럼니스트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 연재됩니다. 한국일보>
지난 8월 어느 날 새벽, 밤샘 마감 중인 내게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 바이든이 부통령 후보로 카말라 해리스를 지명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소식을 내게 알려준 사람은 인도계 미국인 작가이자 배우인 민디 캘링이었다.
물론 그가 나에게 직접 알려준 것은 아니다. 집중력이 현저히 저하되는 동틀 무렵, 일을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아닌 상태로 버티다가 들여다본 SNS의 타임라인에서 민디 캘링이 가장 먼저 소식을 올렸고, 내가 그걸 봤다는 이야기다.
다만 내가 이 순간을 흥미롭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민디 캘링이 가장 빨랐기 때문이다. 민디 캘링은 내가 팔로우 하는 다른 미국 관련 뉴스 계정보다, 심지어 카말라 해리스 본인보다, 지명한 조 바이든보다도 빨리 이 소식을 알렸다.
스마트폰에 카말라 해리스의 계정을 미리 입력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는 속도였다. 카말라 해리스의 이름 뒤로 손뼉 치는 갈색 손 모양의 이모지가 쪼르륵 늘어선 것만을 보고도, 나는 누가 바이든의 러닝메이트가 되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인도계 소녀를 주인공으로 하이틴 드라마를 전복
‘네버 해브 아이 에버’는 민디 캘링이 총 제작과 대본에 모두 참여해서 만든 넷플릭스의 십대 성장 드라마다. “작년은 정말 대환장 파티였다”라는 1회의 설명으로 요약되는 고통스러운 한 해를 보낸 인도계 소녀 데비(메이트레이 라머크리슈넌)가 2학년 때는 누구나 부러워할 법한 고등학교 생활을 보내기로 결심한 뒤에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데비는 1화의 첫 장면부터 힌두교의 신들에게 기도한다. “파티에 초대되게 해주세요. 팔에 털 좀 그만 나게 해주세요. 멍청해도 괜찮으니까 멋진 남친을 사귀게 해주세요.” 그야말로 미국의 하이틴 드라마에서 기대할 법한, 바로 그 학창 생활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은 데비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그 미국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데비는 수영이나 미식축구, 치어리딩, 화려한 파티와 일탈, 학교 최고의 인기인과의 연애가 가득한 드라마에서는 한참 떨어진 인물이다. 심지어 데비는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지만 남자 주인공에게만은 특별한 매력을 보여주는 여자 주인공조차도 아니다.
데비는 유색인종으로 이민자 2세이며, 흔히들 ‘너드(nerd)같다’고 표현할 법한 인물이다. 공부는 잘하지만 조금 숙맥이고 친구도 적으며 소위 ‘인싸’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이 십 대 소녀는 지금까지 드라마에서 주인공은커녕 주인공의 친구로도 출연하기 어려웠을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게 바로 민디 캘링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한 이유다. 미국 드라마 ‘오피스’의 작가이자 배우로 이름을 알렸고 자신의 이름을 딴 ‘민디 프로젝트’로 대중에게 확실히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그는, 인도계 전문직 여성으로서의 자전적 서사를 자신의 작품에 꾸준히 녹여왔다.
인종 하나 바꾸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리고 ‘네버 해브 아이 에버’를 통해 처음으로 지금까지는 주인공인 적이 없던, 자신과 닮은 소녀를 데려와 십 대 여성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민디 캘링은 주인공의 인종이 바뀌면 성장물에서 다룰 수 있는 고민의 외연이 넓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데비에게 팔뚝의 털은 인종적 특징 중에 하나로 십 대 소녀가 외모에 신경을 쓰는 그 이상의 의미이다.
데비는 다양한 인종이 함께 살아가는 이민 국가 이상향으로서의 미국에 살지 않는다. 최근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런 미국은 미디어 속 가상의 국가일 뿐이다. 데비를 포함해 각기 다른 인종이지만 백인은 없는 세 친구의 조합을 백인 학생들이 ‘UN’이라고 부르는 데서, 데비와 친구들이 사는 세계가 이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잔인하게 굴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있다.
데비가 ‘멋진 남자애와의 연애’라는 이 장르의 지상목표에 몰두하는 이유 역시 가족 안에서 묻어둔 트라우마 때문이다. ‘네버 해브 아이 에버’는 시종일관 가벼운 톤을 유지하면서도, 연애와 성정체성,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데비와 친구들의 고민 안쪽에 이들의 인종, 그리고 이를 결정하는 가족과 관련한 문제가 얽혀 있다는 진실을 피해가지 않는다.
무엇보다 ‘네버 해브 아이 에버’의 가장 큰 장점은, 복잡한 문제를 돌파하기 위해 인물이 쉽게 호감 혹은 사랑을 얻게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데비는 자신이 트라우마를 극복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 인기남과의 연애를 위해서 크고 작은 거짓말도 불사하며 온갖 사건을 일으킨다.
친구들을 버려두고 엄마에게 상처를 주는 데비를 기꺼이 지지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각 회차는 ‘네버 해브 아이 에버’로 시작해 ‘~한 적 없어’로 끝맺는 문장을 제목으로 삼고 있는데, 8화의 제목인 “내가 아는 모두를 괴롭힌 적 없어”는 데비가 저지르고 있는 일들에 대한 지독한 반어법이다.
장르적 과장 없이 이야기 자체가 살아있다
민디 캘링은 트라우마를 피해 다니는 과정에서 주변의 모든 사람을 조금씩 괴롭게 만들며, 못난 구석이 시도때도 없이 튀어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찔러버리고 마는 시절을 미화할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인다. 다만 그 시절에조차 나에게 찔리면서도 껴안아 주고, 잘못을 용서해주며, 기꺼이 나의 좋은 구석을 발견하고 또 믿어주는 사람들 때문에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함께 보여줄 뿐이다.
그들 역시도 부족하고 서툰 구석이 있고, 그러므로 나 또한 그런 부분을 감싸주거나 못 본척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도 같이 배우면서, 사람은 그렇게 자란다. 성장 같은 건 하기 싫은 것처럼 기를 쓰고 과거에 머물러보려던 고집스러운 데비가 서툴게 미안함을 전할 때, 비로소 데비가 좋아진다. 이런 방식으로 인물을 좋아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장르적 과장과는 상관없이 이 이야기가 살아있다는 의미다.
넷플릭스에서 지난 몇 년 사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며 연이어 다음 시즌 제작이 확정되었던 ‘오티스의 비밀상담소’, ‘빌어먹을 세상 따위’ 등과는 다른 분위기로 청소년기를 그렸다는 점 역시 이 작품을 반기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다.
소심하고 관계 맺기 어려워하는 창백한 소년을 주인공으로 삼아 성적인 고민이나 자기 파괴적인 심리 묘사에 중점을 두었던 위의 작품들은 십대들의 관계나 성적인 문제를 묘사하는 방식에 있어서 다분히 성인 남성의 시선을 중심에 두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네버 해브 아이 에버’는 데비의 호기심이나 욕구를 긍정하면서도 이 세대의 고민을 한 방향에서만 바라보지 않는다. 데비와 친구들에게는 날뛰는 호르몬이나 성적인 호기심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
또한 같은 장르 중 넷플릭스 오리지널 최고 히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가 여자 주인공이 한국계라는 원작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으로도 낡아버린 장르의 공식에 새로운 느낌을 더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면, ‘네버 해버 아이 에버’는 인종이 바뀌었을 때 이야기가 아주 작은 부분에서부터 달라져야 장르가 도약할 수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단순히 더 많은 소수자를 출연시키기만 하는 것 이상으로, 이들을 제대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보통 그 일은 당사자가 가장 잘한다. 민디 캘링은 ‘네버 해브 아이 에버’를 통해 그걸 다시 증명해낸다.
'더 많이'가 아니라 '제대로' 소수자를 보여줘야 한다
나를 닮은 사람, 나와 비슷한 사람, 내가 겪은 일을 앞서 겪은 사람이 미디어에 등장하는 일, 또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를 보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신이 10대 때는 볼 수 없었던 자신을 닮은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만든 민디 캘링 덕분에, 미국의 인도계 소녀들, 그리고 여성들은 자기를 비추어 볼 거울을 하나 갖게 됐다.
그들은 ‘네버 해브 아이 에버’의 데비에게서 자신을 보고, 나중에는 민디 캘링 같은 작가가 되고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활약할 거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이 나라의 부통령이 될 거야. 대통령이 될 거야’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누구도 유색인종 여성, 이민자 출신의 여성은 그 자리에 갈 수 없다고 말하지 못한다. 카말라 해리스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게 아마도 민디 캘링이 ‘네버 해브 아이 에버’를 만든 이유, 그리고 카말라 해리스가 이룬 성취에 그 누구보다 먼저 박수를 보낸 이유일 것이다. 나 역시 같은 이유로 ‘네버 해브 아이 에버’의 두 번째 시즌과 더불어, 세계의 수많은 여성이 더 많은 유색인종 여성의 이야기, 한국 여성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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