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료비가 비싸면 전기 적게 쓰도록 유도
유가 따라 실적 널뛰는 한전 재무 건전성 취약
전기요금 인상에 따른 반발 여론은 부담
한국전력에서 추진 중인 하반기 전기요금 개편 방향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한전에선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진 건 없다"는 입장이지만 업계에선 연료비 연동제를 골자로 하반기 전기요금 체계 개편이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연료비 연동제는 전기 생산에 쓰이는 석유나 석탄, 천연가스 등 연료 가격의 변동을 전기요금에 바로 반영하는 방식이다.
연료비 연동제가 도입되면 가격 변동성이 큰 국제유가에 따라 전기요금이 움직인다. 쉽게 말해 소비자들은 유가가 내려가면 전기요금을 덜 내고 올라가면 많이 내면 된다. 지금처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장기화로 유가 하락이 지속될 때는 전기요금 인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반대로 유가가 상승하면 소비자 불만이 커질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 전기요금 체계에선 전력생산 원가가 반영되지 않는다. 계절ㆍ시간대별로 요금을 차등하거나 전력 사용량에 따라 요금을 부과할 뿐이다. 국제유가와 관계없이 기본요금은 그대로다.
9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에너지 전문가들 사이에선 전기요금 개편의 필요성은 꾸준하게 제기돼왔다. 최근 에너지경제연구원에서 주최한 '합리적 전기요금 체계 이행을 위한 정책과제 세미나'에서도 이런 분위기는 그대로 전해졌다. 이 세미나에 참석한 박광수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연료 가격은 시시각각 변하는데 전기요금은 똑같으면 합리적 소비 유인을 할 수가 없다"며 "소비자들에게 가격 변화 신호를 제때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연료 가격이 오르면 그에 맞게 전기 소비를 줄이는 것이 국가 경제 건전성을 위해서도 좋다"고 덧붙였다. 연료 가격이 쌀 때는 저렴한 비용으로 전기를 쓰고 연료비가 비쌀 경우엔 전기를 적게 쓰도록 유도하는 정책이 필요하단 진단에서다.
1996년부터 연료비 연동제를 시행한 일본에선 당시 유가 하락에도 전기요금이 30% 이상 상승하자 연동제 도입 여론이 일었고 정부가 수용했다. 일본의 경우 3개월 간 유가 평균값을 계산해 2개월 뒤 전기요금에 적용한다. 급격한 요금변동 방지를 위해 조정액 상하한선을 설정하는 등 안전장치도 마련했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연료비 연동제는 전기요금 등락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통해 미리 대응할 수 있으니 전기를 많이 쓰는 기업들에 도움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국제 유가에 따라 실적이 널뛰는 한전의 재무 건전성 강화를 위해서라도 연료비 연동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2013년 이후 사실상 전기요금이 동결된 가운데 한전은 저유가 시기에는 흑자, 고유가 시기에는 적자를 내는 시나리오를 반복하고 있다. 지난 해 1조2,770억원의 적자를 봤던 한전은 올 상반기에는 8,204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코로나19로 전력 수요가 대폭 줄어든 가운데서도 깜짝 실적을 기록한 건 순전히 유가 하락 덕분이다.
한전의 최근 10년간 원가 회수율(전력판매액을 전력 판매 원가로 나눈 값)은 2014~17년을 제외하면 모두 100% 이하다. 전기를 팔면 팔수록 손해를 봤다는 얘기다. 이에 김종갑 한전 사장은 2018년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콩값(연료비용)이 올라갈 때 그만큼 두부 가격(전기료)을 올리지 않았더니 이제는 두부 가격이 콩 가격보다 더 싸지게 됐다"는 글을 올리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급등락하는 국제유가 시세에 따른 전기요금 왜곡을 막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도 연료비 연동제를 채택하고 있다.
한전에 따르면 국내총생산(GDP) 상위 30개국 중 산유국(멕시코 사우디아라비아 아르헨티나 이란)과 수력발전 비중이 절대 높은 스위스 등 5개국을 제외하고 연료비 연동제를 도입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하지만 연료비 연동제의 하반기 도입 여부는 미지수다. 한전이 전기요금을 개편하려면 이사회 통과 후 정부 전기위원회의 심의ㆍ의결을 거친 뒤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하는 데 정부 입장에서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지금이 저유가라 연료비 연동제에 대한 소비자 저항이 크지 않겠지만 향후 전 세계 경기가 코로나19 여파에서 벗어나 살아나면 국제유가가 다시 오를 수 있어서다. 경기 침체에 따른 내수 부진에 전기요금 인상까지 겹치면 반발 여론이 거세질 수 있다는 점이 부담이다. 정부는 2011년 7월에도 연료비 연동제를 도입하려 시도했다가 고유가가 이어지며 도입을 미루다 결국 2014년 폐지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한전이 어떤 형태로 전기요금을 개편할지 구체적으로 논의된 게 없다"며 "연료비 연동제의 경우 전기요금 변동성이 커지는 문제점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전에서 개편안을 마련하면 종합 검토한 뒤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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