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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는 '혼'을 담지 않는다

입력
2020.09.10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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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타 백자의 시작 (9.10)

'창에 스민 달빛처럼 맑은 마음의 스승'이란 뜻의 '월창정심거사(月窓?心居士)'란 비명을 얻은 이삼평의 상. toso-lesanpei.com

'창에 스민 달빛처럼 맑은 마음의 스승'이란 뜻의 '월창정심거사(月窓?心居士)'란 비명을 얻은 이삼평의 상. toso-lesanpei.com


조선 무명 도공 이삼평(李參平ㆍ? ~1655.9.10)이 일본 규슈 북단 사가현 아리타(有田)의 한 신사에 천황, 영주와 나란히 위패로 안치돼 지역 전통의 도업과 예술적 자존의 상징으로 존숭받게 된 것은, 그가 전쟁 노예로 끌려간 '덕'이었다. 그 불행이 없었다면, 그래서 조선의 지엄한 사농공상 신분 질서에 갇혀 살았다면, 그는 출생 연도의 물음표처럼 존재조차 기억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전쟁 덕에 조선 자기의 가치를 알고 기능인을 존중할 줄 알던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미학과 실용에 대한 그 차이가 16세기 조선과 일본의 문화적 격차였고, 정치와 철학의 격차였다. 한국의 문화사와 수많은 박물관들은 조선백자, 분청사기의 빛나는 유산을 '조선의 혼'이 담겼다며 자랑스럽게 전시하지만, 그 유산을 일군 단 한 명의 장인도 기억하지 못한다.

일본이 기억한 이삼평은 충청도 금강(현 충남 공주시) 출신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벌군 장수였던 아리타의 영주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포로가 됐다. 그는 오라에 묶여 노예처럼 끌려갔을 것이고, 난리통에 가족도 잃었을지 모른다. 그는 '가네가에 산베에(金ヶ江三兵衛)'라는 이름을 얻어 영주의 잔치나 다회에 쓰일 그릇과 다기를 구웠다. 그 그릇의 품질이 성에 안 찼던지, 그는 조선 고령토만큼 좋은 흙을 찾아 영지를 누볐고, 그 집념을 영주가 존중했을 것이다. 1616년 그는 마침내 좋은 흙을 찾아냈고, 그 흙으로 새 가마에서 스스로 자부할 만한 첫 일본 백자를 구웠다. 아리타시 주민들은 만 400년이 된 1916년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의 도공을 위해 비를 세웠고, 이듬해부터 매년 이삼평의 첫 가마가 열린 날(5월 6일)을 '아리타 자기'의 기원으로 기리는 '도조(陶祖) 축제'를 연다.

정유재란으로 끌려가 규슈 남단 가고시마에 가마를 연 전북 출신 도공 심당길(沈當吉)도 오늘날 '심수관요'로 찬란한 '사쓰마 도기(薩摩燒)'의 전통을 빚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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