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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로 희망 주고 싶었죠" 47년 '수제화 장인'의 꿈

입력
2020.09.12 04:3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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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문을 열고 가게에 들어서자 생고무와 가죽 냄새가 코를 찔렀다. 33㎡(10평) 남짓한 공간. 그 바닥과 벽을 가득 채운 구두 수백 켤레가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시선을 사로잡는' 냄새의 근원이었다. 이곳에 깊게 퍼져 있는 그 독특한 기운을, 주인장은 시쳇말로 "갬성 향기"라고 했다. 순간, 절로 무릎이 쳐졌다. 어릴 적 흰고무신을 질질 끌며 어머니를 따라 재래시장 신발가게에 갔던 기억들이 튀어나온 터였다. 며칠 밤을 조르고 조른 끝에 새 신발을 사러 간다는 설렘, 그리고 마침내 새것을 감싼 투명 비닐 포장을 뜯었을 때 풍겨 나오는 고무냄새에 마냥 기뻐했던 일들이 거짓말처럼 가슴을 자극했다. 불현듯 40여년의 시간을 거슬러 어린 시절 추억을 소환하게 하는 건, 이 가게가 품은 '구두 향기'의 힘인 듯했다.

임종찬(왼쪽) 노틀담&바이슨 수제화점 대표와 아들 충호씨가 구두로 가득 찬 가게에서 직접 제작한 구두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씨는 "구두에 손때가 묻을 때쯤 한 켤레가 완성된다. 손을 많이 탄 구두일수록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임종찬(왼쪽) 노틀담&바이슨 수제화점 대표와 아들 충호씨가 구두로 가득 찬 가게에서 직접 제작한 구두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씨는 "구두에 손때가 묻을 때쯤 한 켤레가 완성된다. 손을 많이 탄 구두일수록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 동구 충장로의 한 골목 모퉁이에 위치한 수제화점 노틀담&바이슨. 이 가게의 첫인상은 이처럼 강렬했다. 주인 임종찬(69)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48년째 구두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존심 같은 것이죠." '구두를 만들다'가 아닌 '구두를 한다'는 표현을 쓴 그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고, 눈빛엔 결기가 서렸다. 하기야 50년 가까이 가죽 수제화 만들기만을 고집해 온 그였으니, 더 말해 뭐할까. 그는 스스로도 "바보스럽게 한 길을 걸어왔다"고 했다. 고객들이 그를 '수제화 장인(匠人)'으로 부르는 이유다.

그의 말처럼, 그가 구두를 한 건 1968년이다. 고향인 전남 곡성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해 친척이 운영하던 수제화 공장에서 일을 배웠다. "먹고 살려면 기술이라도 배워라." 집안 형편 탓에 많이 가르치지 못했던 걸 늘 가슴 아프게 생각하셨던 어머니의 이 한 마디가 그를 구두 인생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제화업계에 뛰어든 임씨는 자신도 몰랐던 능력을 발견했다. "나도 내가 손기술이 좋다는 걸 구두를 하면서 처음 알게 됐죠.(웃음) 다른 제화공들에 비해 기술 습득이 빨랐고, 남들보다 한 발 앞서다 보니 공장에선 가욋일로 매장에 구두를 납품하는 일까지 주더라구요. 이를 통해 사업하는 기술과 제화업계 트렌드를 읽는 눈썰미까지 키웠죠." 덕분에 그는 업계 입문 5년 만인 1973년 충장로에 자신의 수제화점을 열 수 있었다. 스물두 살의 어린 그가 당시 호남 제1의 상권으로 불리던 충장로에 떡하니 가게를 차리자, 주변에선 "버텨낼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기우였다. 그의 구두 만드는 실력과 전문성은 곧바로 빛을 발했다. 낭중지추였다. "어린 친구가 손재주가 뛰어나 구두를 제대로 만들어 낸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한 달에 1,000켤레가 넘는 구두를 제작해 납품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물론 여기엔 "장사꾼은 시대 변화를 읽어내고 이에 발맞춰 변화할 줄 알아야 한다"는 나름의 경영철학이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수제 구두 제작에선 실용성과 개성을 토대로 유행을 좇는 손님들의 취향과 욕구에 맞게 신발을 만들어 내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수제화 제작을 그림을 그리는 예술행위로 비유하기도 하죠." 실제 그는 1980년대 '사람마다 제각각인 발에 표준화한 신발을 신고 나의 길을 갈 수 있을까'라는 도발적 문제 제기를 하면서 당시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와 금호타이어, 한라위니어, 연초제조창 등 기업들이 노동자들을 위해 만든 구판장에 구두를 납품하기도 했다.

임종찬 노틀담&바이슨 수제화점 대표가 제작 중인 가죽 구두.

임종찬 노틀담&바이슨 수제화점 대표가 제작 중인 가죽 구두.


그러나 "IMF 때도 끄떡없었다"던 임씨도 구두산업의 사양화라는 거대한 시대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는 수제화 장인으로서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지만 중국과 베트남 등 저임금 생산기지에서 만들어져 국내로 들어오는 기성화의 습격에 자리를 하나둘씩 내줘야 했다. "한때 공장에 제화공이 10여명 있었는데, 지금은 2명으로 줄었습니다. 전망이 없다보니 기술자들이 그만두고, 기술자들을 구하기도 힘들어졌죠. 게다가 최근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까지 겹치면서 한 달에 고작 구두 10여켤레 만들고 있어요. 월 매출이 얼마냐고요? 아이고, 말을 안 할랍니다." 그의 얼굴에선 한동안 쓴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가 가죽 수제화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건 "구두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서"다. 그의 가게가 아직까지 고객들의 사랑을 받는 수제화점이라는 중요한 징표다. 임씨는 양말을 신은 것처럼 편안함을 느끼도록 맞춤형 구두를 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고객의 발이 되어주는 구두(신발)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테면, 장애나 특수체형으로 신발을 신기 어려운 발을 가진 이들을 위해 맞춤형 특수신발을 제작하는 것이다.

"자신의 발로 땅을 딛는 기쁨을 선물해 주고 싶었습니다. 구두는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으니까요. 내 몸의 체형과 균형을 이뤄야 하고 숨을 쉴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발이 불편한 고객에게 편한 신발을 만들어 주는 게 내 일입니다." 그가 합성피혁이 아닌 천연가죽만을 쓰고, 국내에서 가장 많은 3,000여개의 구두골을 확보하고, 장애인용 구두 제작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임씨는 노틀담&바이슨의 또 다른 장수 비결로 '무욕(無欲)'과 '지족(知足)'을 꼽았다. 매일 최선을 다하되 더는 욕심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창고형 점포인 지금의 가게를 매입하는 데 무려 27년이 걸린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사업에 대한 욕구를 키우되, 돈에 대한 욕심은 버린다는 노틀담의 경영 방침은 그런 기세를 바탕으로 유지되는 셈이다. "돈에 초점을 맞추면 일에 재미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목표 달성을 못 했을 때 뒤따르는 스트레스도 엄청나죠. 모든 불행은 욕심에서 옵니다." "장사는 크게, 멀리 보는 것"이라는 장사꾼의 면모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멀리 볼 줄 아는 노포의 뚝심은 '함께' 일하는 기술자들에 대한 배려에서도 엿볼 수 있다. 현재 임씨의 공장에서 일하는 기술자 2명은 50대 후반과 60대다. 세간의 정년이 지났거나 직전인 이들을 끝까지 보듬은 것이다. 그는 "아무리 힘들어도 직원들과 같이 가야 한다. 그래야 오래 간다"고 했다. 그래서, 고희를 바라보는 노포 사장은 여전히 직원들과 함께 구두 가죽을 갈고 망치로 두들기며 구두창을 다듬고 있다.

임씨는 남다른 장사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자신의 손으로 가게와 공장 문을 연다는 원칙을 어긴 적이 없다. 직원들에게 열쇠를 주거나 디지털 도어록을 달면 되겠지만, 매일 아침 8시에 문을 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사장이 책임감과 사명감이 없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임씨의 이런 장사 내공은 아들 충호(41)씨를 동종업계의 길로 이끌었다. 임씨는 2007년 자신의 뒤를 잇겠다며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온 충호씨에게 두 말도 하지 않고 기술을 대물림했다. 충호씨는 "직장생활에 지친 탓도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사람들을 만나면 발부터 보게 되더라"며 "이젠 내가 만든 신발을 신고 뿌듯해하는 걸 보면 더 애착이 간다"고 말했다. 그런 아들을 향해 임씨는 "피는 못 속이는구나 싶었다"고 웃었다.

임종찬 노틀담&바이슨 수제화점 대표는 "50년 가까이 이어온 아날로그 영업 방식을 디지털화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고 했다.

임종찬 노틀담&바이슨 수제화점 대표는 "50년 가까이 이어온 아날로그 영업 방식을 디지털화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고 했다.


아들이라는 든든한 동료이자 후원군을 얻었지만 임씨는 못내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마케팅 방식이 여전히 아날로그에 멈춰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1,000명이 넘는 단골을 비롯해 고객주문카드를 디지털화하지 못한 상태다. 게다가 온라인 쇼핑몰 개설이나 디지털 판매 등 영업의 '진화'도 뜻대로 되지 않아 고민이다. "장사는 시대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는 신념이 유일하게 흔들리는 부분이다. 다만 손님을 대하는 진심만은 버리지 않았다. 그가 "지금 내가 굶지 않고 있는 것도 고객 덕분이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람들마다 발모양이 다 다르기 때문에 수제화를 제작하는 건 항상 처음 가는 길과 같습니다. 그래서 매번 고객과 소통하면서 새로운 시도(구두 제작)를 하는 것이죠. 제 가게가 단순히 오래 생존함에 그치지 않는 거도 여기에 있습니다. " 특별한 마케팅이나 브랜딩 없이, 그저 "구두를 한다"는 장사꾼의 통찰과 장사법치고는 거상의 그것과도 무척 닮아 있었다.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 58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 58


광주=글ㆍ사진 안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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