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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 '판정승' 거둔 의협, 환자 신뢰는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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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 '판정승' 거둔 의협, 환자 신뢰는 잃었다

입력
2020.09.04 18:30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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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정부가 백기투항" 평가
향후 논의도 의협에 맡겨둬
코로나19 상황 의료공백 우려한 정부
백기 들었지만 "애초부터 전략도 부재"

박능후(오른쪽) 보건복지부 장관과 최대집 대한의사협회장이 4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의·정 협의체 구성 합의서 체결식을 마친 뒤 악수를 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박능후(오른쪽) 보건복지부 장관과 최대집 대한의사협회장이 4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의·정 협의체 구성 합의서 체결식을 마친 뒤 악수를 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의사 집단의 완승, 혹은 판정승’

대한의사협회(의협)와 정부ㆍ여당의 4일 전격 합의를 바라보는 의료계 안팎의 대체적인 평가다. 당정은 직역 단체에 밀려 국민 앞에서 한 정책 추진 약속을 어긴 것은 물론, 앞으로 의대 정원 확충 등에 있어 논의 파트너를 의협으로 국한시킴으로써 건강보험 가입자 등 다른 이해 당사자를 배제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통령까지 나서 의사 파업에 “강력 대처”를 지시했던 정부는 이번 합의로 내상을 입게 됐다. 다만 공공의료 강화를 위한 4대 의료 정책에 집단휴진이라는 실력 행사로 반발한 의사 집단 역시 환자와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됐다.

이날 의협이 더불어민주당, 보건복지부와 잇달아 합의한 결과물을 보면 그간 의협이 요구한 내용이 사실상 모두 반영됐다. 의대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신설 추진은 코로나19 안정화 이후까지 관련 논의를 중단한다고 못 박았으며, △의대 증원 △공공의대 신설 △첩약 급여화 시범사업 △비대면 진료 도입 등 4대 의료 정책은 의협과 정부 간의 의ㆍ정 협의체에서 논의한다고 명시했다. 코로나19 안정화 시점을 언제로 볼지 등 각론에서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정부로서는 정책 추진 동력이 사라져 당분간 논의 재개 자체가 어렵게 됐다. 김진현 서울대 간호대 교수는 “여러 지표로 확인되는 의사 수 부족은 건강보험 수가 인상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데 실망스러운 합의가 나왔다”며 “지방에 거주하는 국민들의 이익과 직결된 의사 수 확충 문제를, 지속적으로 반대만 해온 의협하고만 논의해서 풀릴 문제인가”라고 반문했다.

아울러 복지부와 의협은 지역 근무 의사의 건강보험 수가 인상 문제, 보건의료정책 심의 의결 기구인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구조 개선 문제 등 의료 현안을 의제로 하는 의ㆍ정 협의체를 구성한다고도 합의했다. 이는 건강보험료를 내는 가입자와 기업 등을 ‘패싱’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보건의료분야 시민단체들이 “밀실 야합”이라고 반발하는 이유다. 김윤 서울대 의료관리학교실 교수는 “정부가 백기 투항한 것으로 봐야 한다”며 “협상 능력이 없다는 것이 확인된 정부는 권한을 건강보험 가입자와 전문가, 시민단체 등 다른 이해당사자에게 넘기는 게 낫겠다”고 꼬집었다.

참여연대, 보건의료노조 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4일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당정과 대한의사협회의 합의를 비판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참여연대, 보건의료노조 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4일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당정과 대한의사협회의 합의를 비판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굴욕적으로 보일 수 있는 합의에 정부가 나선 배경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의료 공백 장기화를 버티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중환자가 많은 대형병원의 핵심 인력인 전공의들이 똘똘 뭉쳐 단체 행동에 나서고 의대 교수들까지 힘을 보태면서 환자 생명에 위협이 커졌음에도 정부는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정부가 전략적으로 치밀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서영준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정책 방향은 옳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형준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재활의학과 전문의)은 “(의료 행위를 독점한) 의사 파업에 정부 대안은 없었다”며 “이미 2000년 의사 파업을 경험한 정부가 공공의료를 강화해 의사 파업에 대비한 안전 장치를 확보했어야 하는데 그간 시간을 허비했다”고 지적했다.

환자 생명을 담보로 하는, 다른 직역과 비교할 수 없는 막강한 교섭력을 발휘해 정부와 힘 겨루기에서 판정승을 거둔 의협이지만 잃은 것도 있다. 필요하면 우선 순위를 환자보다 집단 이익에 둘 수 있다는 민낯이 재확인됐다는 평가다. 서영준 교수는 “전공의는 물론 의대 교수들까지 나서서 자신들의 특권 의식을 가감 없이 드러낸 사건”이라며 “의사 집단이 공동체 의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줬다”고 말했다.

이성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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