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나 페란테 신작 장편 '어른들의 거짓된 삶'

엘레나 페란테는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으로 고전문학을 전공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얼굴 없는' 작가다. 2011년 '나폴리 4부작'의 1권인 '나의 눈부신 친구'를 출간하며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사진은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나의 눈부신 친구'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HBO드라마의 한 장면. 왓챠 제공
‘사춘기 소녀’는 주인공으로 가장 널리 쓰인 세계 문학 캐릭터다. 변화하는 신체, 특유의 예민한 서정은 외부 환경에 대한 민감함으로 연결되고, 이는 남달리 세상을 보는 시선으로 연결된다. 빨간머리 앤, 말괄량이 삐삐, ‘작은 아씨들’의 조, ‘새의 선물’의 진희는 그렇게 영원히 사랑받는 문학사의 주인공이 됐다.
‘어른들의 거짓된 삶’은 또 다른 사춘기 소녀의 탄생을 알리는 책이다. ‘나폴리 4부작’과 ‘나쁜 사랑 3부작’으로 널리 사랑받은 이탈리아 작가 엘레나 페란테의 최신작으로, 영특한 13세 소녀 조반나가 거짓과 욕망으로 점철된 어른들의 세계에 눈뜨며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나폴리 4부작’의 마지막 편인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가 출간된 지 5년 만의 신작으로 이탈리아에서는 지난해 11월에, 각국의 번역본은 올해 9월 1일 전세계 27개국에서 동시에 출간됐다. 이탈리아에서만 30만부 이상 판매됐고, 넷플릭스가 제작을 확정한 화제작이다.
소설은 페란테가 ‘나폴리 4부작’과 ‘나쁜 사랑 3부작’에서 이미 보여준 바 있는, 이탈리아 나폴리를 배경으로 자아에 눈뜨며 성장해 나가는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다. 조반나는 교사이며 학자인 엘리트 부모님 아래 자란 외동딸이다. 13세 생일을 앞둔 어느날, 조반나는 자신의 성적이 떨어진 것을 두고 부모님끼리 이런저런 걱정을 하던 중 아버지가 “조반나가 빅토리아를 닮아가”라고 말하는 것을 몰래 듣고 충격에 빠진다.

'나폴리 4부작'과 '나쁜 사랑 3부작', 신작 '어른들의 거짓된 삶'에서 페란테는 공통적으로 자신의 고향인 나폴리를 배경으로 주인공 여성이 자아에 눈뜨는 과정을 그린다. 사진은 국내에 번역 출간된 페란테의 작품들. 한길사 제공
빅토리아는 오래전 연이 끊긴 아버지의 여동생, 즉 조반나의 고모로 이 집에서는 ‘추악함과 사악함’의 상징이다. 아버지는 늘 고모가 수치스럽다며 욕했고 어머니는 시누이의 이름을 아예 입에 담지도 않았다. 그런 부모님을 따라 유년시절부터 은연 중에 공포와 혐오의 대상으로 삼았던 고모를 자신이 닮아간다니. 조반나는 직접 고모를 찾아가보기로 한다.
그러나 실제로 만난 고모 빅토리아는 솔직하고 거침없는 매력으로 조반나를 사로잡아버린다. 물론 쉽진 않다. 빅토리아는 상스러운 말을 내뱉고, 화장도 제모도 하지 않는다. 담배 냄새가 찌든 차를 몰고 다닌다. 성적 욕망과 쾌락까지도 숨김없이 드러내고 즐긴다. 감정을 제대로 숨기지 못하는 사람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배워온 조반나건만, 고모에게서 새로운 어른의 모습을 발견한 것.
빅토리아를 알게 된 조반나는 부모의 안정적 삶이, 실은 거짓이 아닐까 의심한다. 그러던 어느날 부모님과 친한 콘스탄차 아줌마와 마리아노 아저씨의 집에서 다함께 저녁을 먹던 중, 조반나는 직사각형 식탁 아래로 엄마와 마리아노 아저씨의 다리가 뒤엉키는 장면을 목격한다.
엄마에 대한 배신감에 휩싸인 조반나는, 빅토리아 고모가 오래전 자신에게 물려줬다는 할머니의 팔찌를 아빠가 몰래 훔쳐다 콘스탄차 아줌마에게 선물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막장드라마처럼 뒤엉킨 이 불륜관계를 통해 조반나는 교양 넘치는 중산층 삶의 가면을 뒤집어 쓴 어른들의 더러운 얼굴을 알게 된 것.

어른들의 거짓된 삶.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492쪽. 1만 6,500원
우아하고 부유한 부모님의 세계, 천박하고 가난한 고모의 세계가 충돌하며 위치가 뒤바뀌는 것을 경험한 조반나는, 이제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기 시작한다. 일부러 못된 짓을 저지르고, 주변에 상처를 주고, 때론 능글맞은 어른의 위선을 흉내내더니, 이윽고 고요히 자신만의 내면으로 침잠해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조반나는 로베르토를 만난다. 사랑하게 되지만, 로베르토에겐 이미 약혼녀가 있다. 로베르토를 차지하고 싶다는 마음과 약혼녀에게 눈물을 안길 수 없다는 마음 사이를 오가면서, 어느덧 조반나 또한 능숙하게 거짓을 일삼는다. 마침내 어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조반나는 “위대한 남성 사상가들이 쉬는 시간 동안 가지고 노는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애완동물보다는 더 나은 존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건 50년간에 걸친 "더 흉악한 배신"이다.
소설은 어른들의 거짓된 삶 또한, 다른 한편의 삶의 진실이기도 하다는 것을 조반나가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관건은 '진실이냐, 거짓이냐'가 아니라 '거짓이되 어떤 거짓이냐, 진실이되 어떤 진실이냐'다. 그게 어른의 세계다.
그래서 조반나의 '흉악한 배신'이 대체 뭐냐고? 부모와도, 빅토리아 고모와도 다른 선택이다. 소설에서 가장 어른 같은 인물이 조반나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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