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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지 않고도 소중함을 깨닫는다면

입력
2020.09.03 22: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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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오늘 거의 2주 만에 제대로 된 파란 하늘이 나타났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대만 남부는 현재 '우기'인데다가 요 며칠 새 태풍까지 지나가서 매일같이 비가 내렸고 우중충한 하늘 사이로 아주 잠깐씩만 파란 하늘과 햇빛이 나타나곤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우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이 지나면 언제 또 제대로 된 파란 하늘을 보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한국은 장마철이 있다고 해도 그리 길지 않고 또 우기와 건기의 차이가 크지 않지만 대만은 한국에 비해서 그 차이가 확실하고 특히나 제가 전에 살았던 필리핀은 아주 뚜렷합니다. 건기에는 몇 달 동안 잠깐의 소나기조차 내리지 않지만 반대로 우기에는 몇 달 동안 거의 매일 비가 내립니다. 하지만 아무리 우기라 해도 하루 이틀 정도 비가 그치기도 하고 며칠씩 비가 계속된다고 해도 먹구름 사이로 잠깐씩 파란하늘과 햇빛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해 인가 두 개의 태풍이 연이어 지나가는 바람에 열흘 가까이 아주 잠깐 동안의 파란 하늘도 햇빛도 보이지 않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주 힘든 일을 겪는 것처럼 스트레스가 엄청났었는데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다 보니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모르다가 나중에야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처음 겪는 일이라 더 힘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하고 나서 일조량이 적은 기후에 사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햇빛에 열광(?)하는지 이해하게 되었고 햇빛이 생물학적인 이유를 떠나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람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지식'이 아닌 '체험'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햇빛처럼 우리 주위에는 너무 흔하고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 소중함을 잊고 사는 것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공기, 물 등등 그 소중함을 지식적으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특별한 직업을 가지고 있거나 특별한 경험이 없는 이상 그 부족함을 체험할 기회가 없기에 평소에는 마치 없는 것처럼 의식하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혹시 부족함을 느껴 본 적이 있다 하더라도 긴 장마로 인한 쨍한 햇빛에 대한 소중함, 황사현상이나 미세먼지로 인한 맑은 공기에 대한 소중함, 운동이나 고된 일을 하고 난 후에 느끼는 갈증으로 인한 물에 대한 소중함 등 대부분 쉽게 해결할 수 있거나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것들이기에 그때가 지나가면 쉽게 잊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사는 게 바빠서일 수도 있고 혹은 우리들이 부덕(不德)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부덕함은 여기에서만 끝나지 않습니다. 가족이나 친지, 오래된 친구들처럼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고 또 그런 만큼 더 잘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이는 머리로만 알 뿐이고 생활 속에서는 '편한 사이'라는 핑계로 나를 중심으로 움직여 주기를 바라며 그들을 혹사시킬 때가 자주 있습니다. 결국 어떤 이유로든 그들이 곁을 떠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 소중함을 체험으로 깨닫고 후회하게 됩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며 '철'이 드는 이유 중의 하나는 가까이에 있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지식으로가 아닌 체험으로 깨달아 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만약 그것을 좀 더 일찍 깨닫는다면 그만큼 후회할 일도 줄어들지 싶습니다.



양상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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