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게 몽고 침략 막아내고 미국도 물리친 저력
총인구 절반 30대 미만... 미래지향적 소비시장 각광
정치적 불확실성 불구 中 대체할 '세계의 공장' 주목
편집자주
오늘날 세계경제는 우리 몸의 핏줄처럼 하나로 연결돼 있습니다. 지구촌 각 나라들의 역사와 문화, 시사, 인물 등이 ‘나비효과’가 되어 일상에까지 영향을 미치곤 합니다. 인문학과 경영, 디자인, 사회문제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경제학자의 눈으로 세계 곳곳을 살펴보려는 이유입니다. 박정호 명지대 특임교수가 <한국일보> 에 3주에 한번씩 토요일 연재합니다. 한국일보>
<9> 세계 각국이 베트남에 주목하는 이유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IHS마킷은 최근 미ㆍ중 무역전쟁의 여파로 베트남이 중국을 대신하는 ‘세계의 공장’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주목했다. 다국적기업들이 중국을 피해 공급 사슬을 다변화하는 과정에서 베트남에 직접 투자하는 경우가 크게 늘어날 것이란 이유에서다.
그렇게 보면 한국은 ‘선구자’라 할 만하다. 십 수년 전부터 이미 베트남과 활발한 인적ㆍ물적 교류를 해온 대표적인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많은 나라들이 베트남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뭘까. 이구동성으로 꼽는 이유는 바로 남다른 국민성이다.
천년 간의 식민지를 거쳐 이뤄낸 독립
역사적으로 보면 한 시대를 풍미한 왕조나 국가들은 많다. 이들의 끝은 대개 허망하다. 타민족 침입으로 국력이 쇠락해지고, 이민족 지배를 장기간 받으며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론은 베트남에 적용되지 않는다. 베트남의 역사를 살펴보면 세계 최강국의 침략이나 지배를 받으면서도 결국엔 승리를 쟁취하는, 흥미로운 역사가 반복된다.
기원전 111년 베트남 왕조 남비엣은 한나라 무제의 침략을 받아 멸망한다. 베트남은 이때부터 중국의 천년(B.C 179~A.D 938) 가까이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 정도 기간이면 나라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명맥이 끊길 법도 하지만, 베트남인들은 끈질기게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983년 독립을 쟁취한다.
독립 후에도 베트남은 세계 최대 규모의 제국을 건설한 원나라로부터 세 차례에 걸쳐 침략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나온 쩐흥다오 장군의 박당강 전투는 베트남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승전 중 하나다.
당시 통치자인 년똥(仁宗: 1273~1293년)은 백성들이 고통을 받지 않도록 몽골에 항복하자는 의견이었지만, 쩐흥다오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박당강의 수위를 이용해 미리 강바닥에 나무 기둥을 심고 원나라 군대를 유인한 후 원나라 배가 나무기둥으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자 불을 질러 대승을 거둔다. 결국 베트남은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몽골 침략을 모두 막아낸 국가가 됐다.
프랑스ㆍ미국ㆍ 중국의 침략을 물리친 저력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베트남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베트남에서 사용하는 문자가 프랑스 덕에 만들어졌다는 점만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 주교인 알렉산드흐 드 호데(Alexandre de Rhodes: 1591~1660)가 정리해 1651년 출판한 <베트남어-포르투갈어-라틴어 사전>은 현재 베트남 문자의 효시가 되었다.
오랜 기간 베트남을 지배한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후 베트남이 독립을 했음에도 여전히 지배권을 요구한다. 프랑스는 1946년 국민투표로 대통령에 선출한 호찌민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호찌민 군이 프랑스를 공격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한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권 진영에 편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를 지원하였다. 반면 호찌민 군은 소련 등의 공산진영의 지원을 받는다. 베트남은 이 전쟁에서도 프랑스를 물리친다. 1954년 호찌민 군이 프랑스 군 요충지인 디엔비엔푸를 함락해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한 것이다.
하지만 몇 년 후 베트남은 다시 미국과 전면전을 벌이게 된다. 1964년 8월 4일 북베트남 수도인 하노이 앞바다를 순찰하던 미국 구축함들이 공해상에서 북베트남군의 공격을 받는, 일명 ‘통킹만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이라 발단이 됐다. 당시 북베트남은 이런 사실을 부인했지만, 미국은 이를 빌미로 북베트남을 폭격했다. 이것이 베트남전쟁으로 알려진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다. 베트남은 이 전쟁에서도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물리치고 승리해 1976년 하노이를 수도로 하는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으로 통일을 이룬다.
하지만 베트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강대국과의 분쟁이었다. 1979년 덩샤오핑의 중화인민군이 베트남을 전격 공격하면서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중국은 베트남을 공격한 이유는 친중국계 캄보디아 정권과 무력 충돌했다는 이유였다. 베트남은 이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뒀고 현재 국경선이 이때 확정됐다.
결과적으로 베트남은 원나라를 비롯해, 프랑스, 미국, 중국 등과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했다. 이 같은 베트남의 저력은 오랜 기간 걸쳐 형성되는 국민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베트남인의 장점으로 꼽는 교육열이나 근면성 등은 과거 역사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미래지향적 소비시장으로도 주목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베트남의 또 다른 강점은 ‘젊음’이다. 2017년 기준으로 베트남의 총인구는 약 9,500만 명으로 세계 15위다. 절대적인 규모가 큰 편인데 인구구조 또한 전형적인 피라미드 형태다. 총인구의 50% 가 30대 미만으로 소비활동이 왕성한 20~30대가 그만큼 두텁다. 베트남을 미래지향적인 거대 소비시장이라 부르는 이유다.
지리적인 이점도 상당하다. 약 6억3,000만명이 살고 있는 아세안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어 아세안 국가로 수출을 꾀한다면 최적의 거점지역이라 할 수 있다. 베트남은 또한 남북으로 길게 해안 지역을 접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동아시아, 서남아시아 등을 잇는 거점 역할까지 가능하다. 조금 더 시야를 멀리하면 베트남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해 생산한 물건들을 미국과 EU 등지로 수출하기도 용이하다.
이런 장점들 때문에 한국은 일찍부터 베트남에 높은 관심을 보여왔다. 베트남은 이미 2017년 기준 중국과 미국에 이어 한국의 3위 수출국이다. 2014년 6위, 2015년 4위를 기록한 것을 감안하면 조만간 미국을 제치고 2위 자리에 오를 가능성도 점쳐진다. 우리나라 기업이 베트남 경제에 영향력도 크게 늘었다. 삼성전자 베트남 법인의 경우, 베트남 전체 국내총생산(GDP)에서 무려 20%를 차지한다. 삼성전자의 실적이 베트남 GDP를 좌우한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셈이다.
기업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의 관심도 뜨겁다. 작년에 베트남에 방문한 한국인 숫자가 400만명을 돌파할 정도다. 개인투자자들은 베트남 부동산에도 관심이 많다. 2015년 7월부터 시행된 주택법 159조에 따라 외국인 개인이나 법인도 베트남에 주택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 불구 성장가능성 높아
하지만 무작정 베트남에 진출했다 큰 낭패를 보는 사례도 적지 않다. 최근 법인세율을 인하하고 불필요한 규제를 폐지하는 등 기업환경이 급격히 개선되고 있지만 상대적인 기준으로 보면 여전히 미흡한 수준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이 평가한 기업환경에서 베트남은 싱가포르을 제외한 아세안 역내에서 7위에 그쳤다.
열악한 사회간접자본(SOC) 인프라도 문제다. 일례로 호치민에서 랑선(Lang Son)까지 운송비가 250달러인데, 호치민에서 미국 서부지역까지 배송비는 200달러 수준이다. 도로뿐 아니라 항만, 철도, 공항 등 기업 활동에 필요한 기초 인프라 구축이 절실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베트남의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특히나 최근 들어 베트남의 무역 구조는 중국, 한국 등으로부터 중간재를 수입해 가공하여 미국이나 유럽연합(EU) 등 선진국으로 완제품을 출하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 중국이 해온 역할을 일정 부분 대체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열악한 인프라와 정치적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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