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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여성의 분노

입력
2020.09.04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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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벨라루스의 반정부 시위를 이끄는 마리아 콜레스니코바가 지난달 2일 시위 취재 중 억류된 언론인들이 갇힌 옥티아브르스키 지역 경찰서 앞을 지나가고 있다. 민스크=타스 연합뉴스

벨라루스의 반정부 시위를 이끄는 마리아 콜레스니코바가 지난달 2일 시위 취재 중 억류된 언론인들이 갇힌 옥티아브르스키 지역 경찰서 앞을 지나가고 있다. 민스크=타스 연합뉴스

돌이켜보면 살면서 분노라는 감정을 다스리고 활용하는 법을 제대로 익힐 기회가 없었다. 분노는 일테면 '여성스럽지 못한' 감정이었다. 실행 여부와는 별개로, '모름지기 여자라면 항상 상냥하고 웃어야 한다'고 배웠다. 여성이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입을 닫으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얼토당토않은 관용적 표현을 무신경하게 받아들이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거리로 나선 벨라루스의 시위대를 보면서 분노란 변화를 이끄는 힘이자 행동하는 감정임을 새삼 깨닫는다. 벨라루스의 민주주의 수호 노력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4주째 이어지고 있는 부정선거 의혹에 따른 대선 불복 시위는 여성의 분노가 표출되고 있는 현장이다. 26년째 재임 중인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의 장기 집권에 항의하는 이들 시위대는 지도부까지도 여성들이 맡고 있다. 플루트 연주자 출신의 30대 여성 마리아 콜레스니코바는 시위를 진두지휘하고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70대 여성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야권이 평화적 정권 이양 준비를 위해 창설한 '조정위원회'의 간부다. 개개인의 분노와 행동은 도달 범위가 제한적이기 마련이지만 이들의 잘 조정된 집단적 분노는 전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흰 옷을 입고 꽃을 든 평화 시위대를 벨라루스 당국이 폭력 진압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의 규탄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루카셴코 대통령의 '든든한 뒷배'인 러시아의 개입 가능성 변수로 이 시위의 결말을 전망하기는 어렵지만 시위대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 여론만큼은 확실하게 번져 나가고 있다.

벨라루스뿐 아니라 최근 이스라엘에서는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에 항의하는 여성들이 거리로 나섰다. 폴란드에선 지난 7월 가정 폭력 금지 협약인 이스탄불 협약 탈퇴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여성들의 분노 표현이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한 것은 2018년 성폭력 피해를 폭로한 '미투(Me Tooㆍ나도 피해자다)' 운동 즈음부터다. 국내에서는 이보다 앞서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들의 분노 표출이 응집했다. 이제 여성들은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상태를 참지 않고 이를 변화시킬 에너지인 분노의 감정을 살필 줄 안다. 십수 년 전 고참 선배에게 "긴 머리가 치렁치렁해 기자답지 못하다"는 말을 듣고도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랐지만, 다행히 이제는 20대 여성 국회의원의 옷차림 지적에 대해 '성차별적 편견'이라는 논평이 나오는 시대가 됐다.

문제는 여전히 세상엔 여성의 분노를 비난함으로써 그 표현의 시도를 줄이려는 이들도 많다는 사실이다. '세상을 바꾸는 여성의 분노'를 충분히 활용하려면 누군가를 불쾌하게 하고, 미움에 직면하는 용기가 아직은 필요한 시절이다.

그런 이들에게 '응징'보다 '생존'에 방점을 찍어 분노를 설명했던 작가이자 여권 운동가인 오드리 로드의 말을 전하고 싶다. "분노란 악의 부산물이 아닌 유용한 불편함과 명확한 대화를 위한 촉매다. 정확한 대상에 초점을 맞춘 분노는 진보와 변화를 촉진하는 강력한 에너지가 될 수 있다." 그가 1981년 미국 여성학회에서 강연한 내용을 담은 에세이 '분노의 활용'에 남긴 주요 메시지다.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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