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대를 살아가는 서울시민에게 선망의 삶은 무엇일까. 주거로 본다면, 아마도 강남 30평대 아파트가 기본으로 들어갈 듯하다. 옛날 서울 시민에게도 표준적인 삶의 모델이 있었다. 1960년대는 입식 부엌을 갖춘 문화주택이었다. 다분히 일본의 주택정책을 모델로 하는 것이었다. 문화주택은 다수가 이른바 집장수 집이었다. 똑같이 생긴 양옥 주택이 서울 곳곳에 세워졌다. 집이 있으니 요즘 말로 인테리어, 즉 뭔가 채워 넣어야 하는 욕망의 유행이 생겼다. 소설가 이호철 선생이 '서울은 만원이다'를 발표하던 1966년도 이후의 일이다. 서울이 비로소 현대 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구획된 주택지가 공급되던 시기인 70년대의 대유행이었다. 응접실이란 말이 회자되고 ‘소파’와 ‘차단스’(그릇 장식장의 일본어)를 너도나도 들여놓았다. 장식장이 있으니 채울 것도 필요했다. 화려한 꽃무늬가 새겨진 유리잔, 크리스털 음료잔이 장식장을 ‘장식’했고, 밀키글라스라는 이름의 접시를 월부로 사는 게 대유행이었다. 금성사 냉장고에서 얼린 얼음을 꺼내어 ‘탱’ 오렌지주스를 꽃무늬나 음각한 크리스털잔에 타서 손님을 ‘응접’하는 것이 도시 문화시민의 자세였달까.
이때 밥상의 변화도 심했다. 곤로라는 일본식 이름의 풍로가 연탄 화덕을 대체하거나 보조했고, 밥상에서는 사기그릇과 양은그릇이 물러났다. 스테인리스 그릇의 대물결이 부엌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스테인리스는 원래 군사무기의 소재로 개발되었다. 녹이 슬지 않는다는 건 군사적으로 매우 큰 강점이었다. 점차 서방 일상용품의 세계로 넘어왔고, 한국도 그 무대가 되었다. 당시 문화적인 삶은 사기나 놋그릇을 버리는 것이었다. 행상이 스테인리스 그릇을 가지고 다니며 놋그릇과 바꾸거나 판매했다. 어린 시절, 산더미 같은 사기그릇과 놋그릇이 행상의 리어카에 실려서 교환되던 장면이 기억난다. 스테인리스는 사기와 놋그릇-양은(사기와 공존)으로 변해가던 식기 역사를 흔들어놓았다. 우선 가벼웠고 양은처럼 찌그러지지 않았다. 어머니들의 일손이 크게 줄었다.
스테인리스는 요즘도 인기다. 그러나 요즘 많이 팔리는 스테인리스는 과거에 비해 훨씬 조악하게 여겨진다. 오래된 스테인리스 그릇을 보면 녹도 안 슬고, 무게감도 적당해서 든든하며 흠집도 잘 나지 않는다. 스테인리스 도입사에는 밥공기를 뺄 수 없다. 1960, 70년대에 서울시와 중앙정부에서 추진하던 이른바 주곡 변화 정책은 식당의 밥그릇을 바꾸도록 유도했다. 이미 식당들은 사발 대신 스테인리스로 바꾸고 있었다. 다만 그 크기가 줄지는 않았다. 혹시 집에 큰 스테인리스 ‘주발’이 있으면 그게 당시 밥그릇이었다고 보면 된다. 정부는 더 작은 ‘공기밥’ 그릇으로 바꾸도록 유도했다. 사실상 강제 이행 명령이었다. 당시 추진된 자료를 보니 너비 10.5㎝ 높이 4.5㎝가 공기밥의 표준 크기였다. 어쨌든 주곡을 덜 먹고 반찬을 많이 먹는 당대의 식생활은 그 당시에 맹아가 있었던 셈이다. 요즘 그 옛날의 스테인리스를 보면 반갑다. 누군가 도자기 그릇이 아닌 스테인리스가 천박하다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스테인리스는 훨씬 위생적이다. 다루기 편하며 그 덕에 싼값에 밥을 파는 수많은 영세식당 설거지 일꾼들의 손목을 지킬 수 있었다. 게다가 오래된 스테인리스는 생활골동품이라 해도 충분하고, 독일 같은 유럽에서는 스테인리스 식기를 명품 취급하기도 한다. 스테인리스 우습게 보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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