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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학벌사회에서 실력사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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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학벌사회에서 실력사회로

입력
2020.09.03 16:1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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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한국장학재단 이사장

이정우 한국장학재단 이사장

이정우 한국장학재단 이사장


한국은 학벌사회다. 학벌사회란 무엇인가?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하는 것이 평생 그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정도로 영향력이 큰 사회를 말한다.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은 우선 취직에서 유리하다. 취직 후에도 좋은 학벌을 가진 사람은 회사나 조직 속에서 순탄하게 생활할 수 있고, 대학 선후배들의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후원에 힘입어 승진, 출세가 비교적 용이한 편이다. 어디 취직 뿐이랴. 학벌이 좋은 사람은 결혼 상대를 만나는 데에서도 유리하다. 이래저래 좋은 대학을 나온다는 것은 한국에서 평생 안락한 생활과 출세가도, 행복을 약속하는 보증수표라고 해도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그래서 학부모들은 자식을 좋은 대학을 보내는 데 전심전력을 다한다. 수년 전 화제가 됐던 TV드라마 ‘스카이 캐슬’은 적나라하게 망국적 과외 열풍을 고발했다. 과거에는 일부 학생들만 하던 과외가 이제는 보편화한 지 오래고, 과외를 시작하는 연령도 아주 낮아져 각종 과외에 시달리는 어린 아이들 보기가 안쓰러울 정도다. 중고등학교 교육은 모두 대학입시에 목표를 두고 커리큘럼이 짜여져 있고, 학생들은 주어진 틀 속에서 조그마한 자유나 일탈도 허용되지 않는다. 국영수 중심의 공부가 무한반복되고, 예체능 과목은 뒷전이다.

영국의 명문고교로서 지금까지 500년의 역사 속에서 경제학자 케인즈와 20명의 총리를 배출한 이튼학교는 교훈이 ‘약자를 배려하는 사람이 돼라’는 것이고, 여러 과목 중 가장 중시하는 과목이 체육이라고 한다. 학생들은 매일 축구, 럭비를 하면서 단결심, 협동심을 기른다. 우리는 언제 이런 교육을 할 수 있을까? ‘지덕체’는 교실 벽에 걸린 훌륭한 교육이념이지만 우리의 현실과는 크나큰 거리가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임기 중 두 차례나 한국의 학교교육을 칭찬하면서 자기 딸들을 한국의 고교에 보내고 싶다고 말해서 세계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우리로서는 “아니 이게 웬일?” 하면서 우쭐할만도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의 고등학교 현실을 너무나 모르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 딸들은 만일 한국의 고교에 입학한다면 아마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인간성과 개성을 무시한 입시 위주 한국 교육의 스트레스를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 더 오래 전 한국의 어느 TV 방송국이 서울과 파리의 고교를 하나씩 골라 같은 시간대의 양국의 교실 모습을 취재한 것을 흥미롭게 본 적이 있다. 고교 등교시간은 한국이 프랑스보다 훨씬 빨랐다. 프랑스 학생들이 이제 등교를 시작할 무렵에 한국 학생들은 이미 등교를 완료해 있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 학생들은 하나 둘 잠에 빠져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는데, 나중에는 과반수가 넘는 반면 프랑스 학생들은 전원이 말똥말똥한 눈으로 교사의 수업을 경청하고 있었다. 이것이 두 나라 교육의 실상을 여지없이 드러냈다고 본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비정상적인 교육을 계속해서 자라나는 아이들을 힘들게 할 것인가. 한국인들의 평생 학습 패턴을 보면 대학입시를 정점으로 그 뒤 급격히 떨어지는 모양을 보인다. 이것은 평생 큰 변동없이 꾸준히 공부하는 선진국 사람들의 학습패턴과는 대조적이다. 국민들의 인적자본 형성이란 관점에서 보면 바람직하지 못한 패턴이다. 앞으로는 대학입시 전에는 덜 공부하고 여유있는 생활을 하도록 하며, 그 뒤에 오히려 더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공부하는 패턴으로, 즉 평생학습사회로 바꿀 필요가 있다.

특목고, 국제고 같은 입시 위주 학교들을 줄여나가고, 직업계 고등학교의 교육을 강화, 개선하여 그 졸업생들이 취직, 교우관계, 결혼 등에서 불리하지 않은 선진국형 사회로 탈바꿈해야 한다. 독일식의 학습과 실습을 병행하는 2원적 교육체계를 확립하여 고등학교만 나와도 충분히 행복한 인생을 영위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한국장학재단은 지난 달 세종시에 ‘중앙취업지원센터’를 개소해 직업계 고교생들의 학업과 취업을 돕는 일을 시작했다. 처음 가는 길이라 서툴고 어려움이 많지만 우리 사회가 반드시 가야 할 길이므로 분투 노력할 각오를 다지고 있다.

모든 학생들이 대학을 갈 필요도 없고, 대학을 가지 않고 바로 취직한 뒤 평생 자신의 관심에 따라 학습하는 경로도 훌륭한 인생이란 인식이 널리 퍼질 필요가 있다. 직업계고교 졸업생들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고 지원해주는 것은 종래 과다한 학력간 불평등, 차별을 감소시켜 삶의 질을 높일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인적자본 형성에도 기여해 국가경쟁력 강화, 경제발전을 크게 도울 것이다. 오랜 폐습인 학벌사회를 청산하고 만인이 실력에 의해 평가받는 실력사회를 실현하는 것은 우리가 당면한 최대, 최긴급 과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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