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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논란’이라고 하는 것들

입력
2020.09.01 22: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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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도 조이가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 모른다. 이 티셔츠는 크리스찬 디올이 2016년 패션쇼에서 선보였다. 티셔츠에 새겨진 문구는 나이지리아 출신 미국 작가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가 쓴 책 제목이다. 팝스타 비욘세의 노래에도 등장한다. 이 책은 페미니즘 사상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힌다.

나는 지금도 조이가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 모른다. 이 티셔츠는 크리스찬 디올이 2016년 패션쇼에서 선보였다. 티셔츠에 새겨진 문구는 나이지리아 출신 미국 작가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가 쓴 책 제목이다. 팝스타 비욘세의 노래에도 등장한다. 이 책은 페미니즘 사상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힌다.


옷 이야기로 시작해야겠다. 레드벨벳 멤버 조이가 8월 19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WE SHOULD ALL BE FEMINISTS’라는 글자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올렸다. 직후 한 남초 커뮤티니에 비난의 글이 올라왔다. 한 매체가 이를 인용해 기사화했다. 거의 동시에 수많은 인터넷 매체들이 경쟁하듯 달려들어 서로 베껴가며 ‘심각한 논란’으로 확대재생산했다. 그게 조이 티셔츠 논란의 전말이다.

나는 그 ‘논란’이란 말이 거슬렸다. 그들만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그들만의 리그로 벌어지는 막말의 성찬과 혈투가 도대체 무슨 논란의 가치가 있는 걸까. 그건 논란 축에도 못 낀다. 사실 조이가 그 티셔츠를 그냥 멋으로 입은 건지, 심오한 뜻으로 입은 건지 공개적으로 밝혔다면 바로 정리됐을 문제였다. 그러나 그녀는 옷만 입고 논란만 일으키고 입은 다물었다.

조이는 실검 상위에 올라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했지만, 남긴 건 이런 식으로 장사하는 매체의 클릭 수밖에 없다. 여성 연예인은 늘 이런 식으로 소비됐다. 민감한 젠더 이슈도 늘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조이의 티셔츠보다 더 말이 많았던 옷이 있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8월 4일 국회본회의장에서 입은 분홍 원피스다.

이 논란의 시작은 통신사인 연합뉴스가 ‘무심코’ 송출한 한 장의 사진이었다. 그 사진의 의도를 알고자 열심히 찾아봤다. 모든 보도사진에는 사진 설명이 따라 붙는다. 그날 오후 4시 49분에 내보낸 사진 설명은 딱 한 줄이었다. “정의당 류호정 의원이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잠시 퇴장하고 있다.” 그 기자는 왜 유독 류 의원 사진을 찍었을까. 평소에 보던 여성 의원의 옷차림치고는 좀 특별했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역시 먼저 특정인들이(조이의 경우와는 달리 정파성까지 개입된) 이 사진을 보고 달려들었다. 입에 올리기 민망한 성희롱성 댓글들이 쏟아졌다. 압권은 ‘외상값 받으러온 룸살롱 새끼마담’이었다.

동시에 거의 모든 미디어가 기다렸다는 듯 가장 선정적 댓글들만을 제목으로 나열하며 역시나 ‘논란’이라고 보도했다. 단 몇 시간 만에 양대 포털에 각각 1,000건에 가까운 기사가 쏟아졌다. 적어도 ‘레가시 미디어(전통 언론)’로 분류되는 매체들만은 이런 기사에 초연해야 했다. 듣보잡 인터넷매체와 경쟁할 기사가 있고 아닌 게 있다.

나는 이 난리브루스를 보며 “갑자기 원피스가 입고 싶어지는 아침”이라고 가볍게 툭 던진 심상정 정의당 대표의 한 마디가 올해의 베스트 코멘트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만약에 류 의원이 정말로 국회의 권위적 분위기에 대해, 성인지감수성 부족하신 나이 든 남성 의원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싶은 적극적 생각으로 어깨가 드러난 원피스를 보란 듯이 입고 나왔다면 혹 모르겠다. 미국 의회에선 실제로 여성 의원들이 그런 단체시위를 한 적이 있다. 그랬다면 확실히 ‘논란다운’ 논란이 될 수 있었을 거다.

국회의원이 직장여성 출근복 같은 걸 입고 국회에 나왔다고, 여성 연예인이 ‘82년생 김지영’ 한번 읽은 걸 두고 ‘논란’이라고 보도하면 우리 사회에 젠더갈등과 성별혐오의 골은 더욱 깊게 파질 뿐이다. 오직 클릭장사만을 위해 소모적으로 생산 소비되는 이런 ‘논란 아닌 논란’을 지켜보는 일도 이젠 지겹다.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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