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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원순 시장이 여성시민에게 남긴 빚

입력
2020.09.01 18:00
수정
2020.09.01 19:38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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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장 비극에 시정 참여 여성들 떠올라
고인의 성평등정책 꽃피운 여성 역할 커
성과 헛되지 않도록 여성정책 이어가길


고 박원순 서울시장 영결식 . 사진공동취재단

고 박원순 서울시장 영결식 . 사진공동취재단


고(故) 박원순 시장이 세상을 떠난 지 두 달이 지났다. 그의 죽음에 관련된 정황을 두고 국가인권위원회가 조사를 하고 있다지만, 우리는 아직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래서 간간이 칼럼이나 페이스북에 오르는 개인적 소회의 글들이 누군가에는 슬픔을, 누군가에는 분노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우리는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에 있다.

고인의 실종과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그의 업적도 그에 대한 기억도 아니었다. 그와 함께 여성운동과 여성정책을 펼쳐 나갔던 사람들, 여성운동의 오랜 동지들,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와 고락(苦樂)을 함께 하며 애썼던 공무원들, 지식과 경험을 나눴던 전문가들이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속에 가장 아프게 떠올랐던 이들은 25개 자치구에서 활동하는 여성주민들이었다. 고인은 시장으로 당선된 후 주민자치와 풀뿌리 민주주의의 활성화에 힘을 기울였다. 시장 재임 초기 관료주의적 관행에 물들어 있던 공무원들의 저항과 정치적 반대자의 공세를 무릅쓰고 시민의 시정(市政)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제도를 만들고 예산과 인력을 투입했다. 이런 고인의 노력에 가장 적극적으로 응답했던 이들이 여성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전업맘, 일과 돌봄 사이에서 쫓기는 워킹맘, 청년여성들, 중년과 노년 여성들이다. 살아온 내력과 살고 있는 모습, 살아갈 미래는 다르지만 ‘마을’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함께 모여 주민자치와 마을만들기 운동을 해나간 여성들이다.

이들은 공동육아센터를 만들었고, 청소년을 위한 공부방을 만들었다. 낡은 주택을 도서관으로 개조해 운영하기도 하고, 동네 밥집과 부엌을 만들었다. 계절이 바뀌면 장터와 축제를 열어 평소에는 얼굴 보기 힘든 주민을 초대했고, 어린아이부터 중년까지 함께 하는 연극무대를 꾸렸다. 동네를 친환경 에너지 마을로 바꾸기도 했고 아파트 건설로 사라질 뻔한 동네 뒷산을 지키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마음에 남았던 것은 ‘젠더거버넌스’를 꾸리는 여성들이다. 성평등 정책을 제안하고 시정을 감시하는 여성정책 네트워크다. 이들은 성인지예산이나 성별영향평가 같은 사업을 시행해 연말이면 사업보고회를 열었고, 이 자리는 늘 박 전 시장이 참석했다. 몇 해 전 이 모임에 강사로 참여했을 때 보았던 이들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따뜻한 지지와 뜨거운 열망. 서울시가 더 적극적으로 성평등 정책을 시행해 가야 한다는 열망과 그 책임자로서 고인에 대한 지지의 표현이었다.

이들은 사업비 이외에 별도의 금전적 보상을 받지 않는다. 일과 중 상당한 시간을 이 활동으로 보내지만 대부분 어떤 직함도 없다. 그래서 나는 몇 해 전 명함을 하나씩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명함을 만들려면 약간의 돈이 필요한데 당시 그 예산도 없었다. 명함조차 주어지지 않은 활동에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쏟아 부었다.

유서에도 남겼듯이 고인은 많이 미안할 것이다. 그동안 서울의 여성정책이 성과를 거뒀다면 고인만의 몫은 아니다. 이름은 남아 있지 않지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여성들이 성평등 민주주의의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다, 지난 두 달 동안 그들이 느꼈을 슬픔과 상처를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들이 느낀 감정이 분노든, 연민이든, 배신감이든, 상실감이든 위로의 말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신의 이름이 ‘순’으로 끝나 여성친화적인 사람이라는 그의 오래된 농담에 늘 신선한 듯 웃어주던 서울의 여성시민들에게 고인이 진 빚을 누군가는 갚아야 할 것이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ㆍ전 한국여성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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