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간쑤 남부와 칭하이 동부 ③ 황중과 청해호
원나라 말기인 1357년, 칭하이성에서 티베트 승려이자 천재 학자가 태어났다. 7살에 계율을 맹세하는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16세에 라싸로 갔다. 티베트의 중심에서 여러 종파의 고승에게 사사하고 정진을 거듭해 일가를 이룬다. 그는 종교개혁을 부르짖었으며 겔룩빠를 창시했다. 법명은 지혜롭다는 뜻을 지닌 롭상닥빠, 보통 쫑카빠(宗喀巴) 대사라 부른다. ‘빠’는 사람이란 뜻이며 ‘쫑카’는 지명이다. 쫑카에서 온 사람이란 말이다. 칭하이성 성도 시닝에서 서남쪽으로 30km 떨어진 황중(湟中)이 티베트 말로 쫑카다.
8개의 초르텐...칭하이의 티베트 불교 사원 타얼사
쫑카빠의 고향에 겔룩빠 6대 사원 중 하나인 타얼사(塔?寺)가 있다. 전동차를 타고 10분 이상 들어가야 사원 입구다. 티베트 말로 ‘10만의 사자후 불상을 품은 초르텐(불탑) 사원’이란 뜻으로 꾼뒨이라 한다. 서양 사람은 쿰붐(Kumbum)이라 부른다. 10만개의 불상이라거나 10만 마리 사자의 포효로 해석하면 틀린 말이다.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부처의 마음을 담았다고 해석해야 바르다. 부처의 8대 공덕을 상징하는 여래팔탑(如來八塔)에 중국어와 티베트어를 나란히 적었다. 그러나 이 8개의 탑은 타얼사라는 이름으로 불린 지 한참 후에 세워졌다.
쫑카빠의 어머니는 아들이 라싸로 가고 6년이 지나자 그리움의 편지를 보냈다. 한번 집에 다녀가길 바란다는 마음을 담았다. 학습에 열중하던 아들은 자신의 선혈로 그린 자화상과 사자후 불상을 보내 회신했다. 사자후는 곧 부처의 설법이니 자신이 출생한 장소에 불탑을 세우기를 당부했다. 불탑이 곧 쫑카빠 자신이란 뜻이었다. 다음해 신도들의 도움을 받아 불탑을 세웠다. 그리고 180년이 지난 1560년 한 수도승이 탑 옆에 불전을 세웠다. 지금의 대금와전(大金瓦殿)이다. 탑이 먼저 생기고 사원이 생겼다. 자연스레 타얼사라 불렀다. 이후 여러 불전이 세워지고 중건도 잇따랐다. 쫑카빠 대사의 후광 덕분이다. 여래팔탑은 1776년에 세웠다.
처음 만난 불전은 소금와전(小金瓦殿)이다. 1631년에 세웠다. 3세 달라이라마가 타얼사까지 백마를 타고 왔다. 다시 몽골 칸을 만나기 위해 출발하려는데 말이 갑자기 움직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며칠 더 머물렀는데 그사이 스스로 아사했다. 소금와전은 원래 호법신전(護法神殿)으로 불렀고 백마 표본이 한 필 있다. 금빛 기와로 세운 두 개의 불전 중 하나다. 바로 옆 불전은 7세 달라이라마의 장수를 기원하는 기수전(祈壽殿)이다. 1717년에 세웠는데 실내에 불상이 빼곡하다. 공간이 좁고 사람이 많아 자세히 보긴 힘들다. 여름이면 마당에 있는 보리수가 꽃을 피워 향기가 사방에 퍼진다. 화사(花寺)라고도 부른다. 나무 옆에 바위가 하나 놓여 있다. 쫑카빠 어머니가 매일 물동이를 이고 가다가 앉아 쉬던 자리다. 아들의 축복을 빌며 멀리 서쪽 하늘을 바라보던 어머니의 모습이 전설로 이어지고 있다.
1606년에 건축된 대경당(大經堂)이 나타난다. 타얼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데 대문이 좁아 줄을 서서 지난다. 기둥이 168개에 이르며 1,000여명이 넘는 승려가 함께 불경을 암송하던 공간이다. 가로 13칸, 세로 11칸에 2층이다. 한 바퀴 돌고 나오는데 사람이 많아 한참 시간이 걸린다. 쪽문으로 빠져나와 골목을 지나면 의명경원(醫明經院)이다. 티베트에는 고대부터 다섯 종류의 교육기관인 오명(五明) 학원이 있다. 내명(?明ㆍ불학), 외명(外明ㆍ천문학), 공교명(工巧明ㆍ공예와 역법), 성명(聲明ㆍ언어학), 의방명(醫方明ㆍ의학)이다. 의명경원은 오늘날 의과대학이다.
쫑카빠를 봉공하는 의호전(依?殿)과 석가모니를 봉공하는 석가불전(釋迦佛殿)이 나란하다. 흡연 촬영 접촉 소리금지 표지가 있다. 경건한 장소이니 당연하겠지만 사람이 많아 구경하기 쉽지 않다. 실내 촬영은 엄두도 내기 힘들고 바깥 모습을 찍어도 제지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목소리를 막기는 어려우니 꽤 시끄럽다. 마니룬을 따라가면 사원 중심인 대금와전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1560년 최초로 불탑이 세워진 자리로 쫑카빠가 출생한 장소다. 안에는 12.5m의 대은탑(大銀塔)이 자리 잡고 있다. 쫑카빠의 유해가 보존된 영탑(靈塔)이다. 청나라 시대인 1711년 중건하면서 황금 1,300량, 백은 1만량을 사용해 지붕을 덮었다. 순례자들은 쫑카빠의 영혼을 향해 끊임없이 오체투지를 한다.
대금와전 옆에는 1577년 건축된 미륵불전이 있다. 미륵불 12세 등신 좌상이 있는데 석가모니 사리와 쫑카빠 머리카락이 봉안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치형 문 사이로 불전 기둥이 보인다. 사잇길로 들어가면 1592년 처음 건축한 후 1734년에 확장한 문수보살전으로 이어진다. 모두 9칸이며 3칸씩 나눠 쫑카빠전, 문수전, 사자후불전이 있다. 중앙에 문수보살이 자리잡고 쫑카빠와 사자후불이 협시하는 모양새다. 깊이도 3칸이라 정사각형이 셋이 붙어 있고 구간전(九間殿)이라 부른다.
1578년 겔룩빠 법왕이던 쐬남갸초(索南嘉措)가 당대 북방의 강자인 타타르 민족의 대칸 알탄(俺答)과 회동했다. 몽골계와 돌궐계 부족 연합인 타타르는 명나라 변방을 장악한 후 티베트로 군대를 진격하고 있었다. 청해호 남쪽의 티베트 사원에서 평화회담을 성사시키고 서로에게 봉호를 주고받았다. 쐬남갸초는 ‘바다와 같은 지혜를 지닌 스승’이란 뜻인 달라이라마를 봉호로 받았다. 겔룩빠는 몽골족의 군사 지원과 통치 명분을 얻어 티베트 불교의 주류가 된다. 타타르는 겔룩빠를 신봉하게 됐으며 몽골 일대에 전파하는 계기가 됐다. 쐬남갸초는 3세 달라이라마로 자칭하고 쫑카빠의 제자인 겐된둡빠(根敦朱巴)를 1세 달라이라마로 추증한다.
3세 달라이라마 쐬남갸초가 1583년 두 번째로 타얼사를 다녀간 후 행궁도 마련했다. 4ㆍ5ㆍ7ㆍ13세와 인도 다람살라에 현존하는 14세 달라이라마도 다녀갔다. 행방이 묘연한 6세와 요절한 8~12세 달라이라마를 빼면 대부분 행차한 곳이다. 달라이라마가 행궁에 머물면 불자가 홍수처럼 밀려들어 부흥을 거듭했다. 바깥에 나오니 온 사방에서 말을 타고 기념사진을 찍으라고 성화다. 오체투지하러 사원으로 향하는 불자가 지나간다. 티베트 복장을 빌려 입고 사진 찍는 사람도 많다. 이제 쫑카빠의 고향을 떠나려 한다. 45km 동쪽에 딱체르(Taktser)가 있다. 14세 달라이라마의 출생지다. 마음만 있지 실제로 가기에는 불가능하다.
금은탄과 원폭실험...청해호 일주 끝에 뜻밖의 불쾌감
칭하이성에서 시짱(티베트)까지 칭짱철로(?藏鐵路)가 있다. 시닝역에서 출발해 라싸까지 21시간 30분 걸린다. 시닝은 중원과 토번(티베트)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기차로도 오래 걸리는데 옛날에는 얼마나 힘들게 왕래했을까? 시닝에는 중국에서 가장 큰 호수인 청해호가 있다. 가는 길에 일월산(日月山)이 있다. 당나라 시대에 토번으로 이어지는 당번고도(唐蕃古道)가 지나는 곳이다. 문성공주 기념관도 있다. 문성공주는 토번을 통일한 군주 쏭짼감뽀와의 결혼을 위해 이 길을 지나갔다. 장안(시안)을 출발해 시닝을 거쳐 일월산에 도착했다. 약 1,000km의 노정이었고 2달을 머물렀다. 다시 라싸까지 2,300km를 가야 한다.
당나라는 주변국에 정벌과 화친이라는 두 가지 외교정책을 시행했다. 호시탐탐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토번은 쓰촨성 쑹저우(松州)를 공격하는 한편, 당나라와 화친을 맺기를 바랐다. 재상 가르똥짼은 장안에 도착해 당나라 공주와 토번 왕과의 결혼을 제안했다. 가르똥짼은 육시혼사(六試婚使)라 불리는 당나라 태종이 낸 여섯 난제를 모두 풀고 화친을 성사시킨다. 이 이야기는 라싸의 포탈라궁 벽화에도 새겨져 있다는데 몇 번을 갔지만 볼 수 없었다. 해발 3,520m의 일월산 정자 벽면에 타일로 장식돼 있어서 너무 반가웠다.
작은 구멍이 있는 돌에 실을 꿰라는 시험이 첫 번째 과제다. 실을 개미 허리에 묶고 구멍 반대쪽에 꿀을 발라 통과하게 했다. 두 번째는 100필의 암말과 망아지, 100마리의 어미 닭과 병아리를 풀어놓고 엄마와 새끼를 짝지으라는 시험이다. 말에게 물을 주지 않았고 닭에게 모이를 뿌리자 제각각 모두 엄마를 찾아갔다. 세 번째는 양을 안주로 항아리의 술을 모두 마시고 양의 가죽을 벗기는 시험이었는데 조금씩 마시고 고기를 토막 내 먹으며 취하지 않는 방식으로 통과했다. 네 번째는 소나무 토막 100개를 주고 뿌리 쪽을 찾으라는 시험, 강물에 모두 던지니 무거운 뿌리 쪽이 가라앉았다. 밤에 돌아다니다가 숙소를 찾는 다섯 번째 시험은 길을 잃지 않으려고 미리 골목에 표시를 해 무난히 통과했다. 마지막은 화려하게 치장한 여성 300명 중에서 공주를 찾으라는 시험이었다. 공주를 모신 적이 있는 노파에게 미리 용모를 파악했기에 쉽게 풀 수 있었다.
일월산에서 서북쪽으로 1시간 가면 청해호다. 호반 도로 한 바퀴는 약 380km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거리와 맞먹는다. 청해호는 해발 3,200m에 위치한 소금 호수로 면적은 4,500km²가량이다. 서울의 7배다. 도로를 달려 부두에서 유람선을 탄다. 바다 같은 호수를 바라보니 멀리 설산도 시야에 보인다. 호수와 설산이 함께 나타나는 장면을 감상하며 30분을 가면 마치 검처럼 생긴 반도인 이랑검(二?劍)에 도착한다. 티베트 깃발인 타르초가 휘날리는 호수를 만끽하며 산보한다.
다시 도로를 달리는데 호수 옆이 온통 유채의 바다다. 설산 호수 유채가 한꺼번에 어우러지니 신통방통하다. 유채밭에는 말도 있고 결혼사진을 찍기도 한다. 여러 사람이 모여 티베트 아이 둘을 열심히 찍고 있다. 모델처럼 자세도 잡고 춤추며 노래한다. 각자 5위엔씩 돈을 건넨다. 나도 사진과 영상을 마음껏 찍었다. 그런데 5위엔을 주니 섭섭한 표정이다. 티베트 말을 하는데 도무지 알 수 없다. 아마 누구보다 사진과 영상을 많이 찍었으니 더 달라는 뜻이었던 듯하다. 한참 후 깨닫게 된 사실이다. 지금도 순진무구한 티베트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깊다. 청해호를 다시 가면 만날 수 있으려나.
청해호의 가마우지를 보러 단도(蛋島)에 내린다. 입구에서 내려 1.5km를 걸어가면 온갖 새가 날아다닌다. 호수 끝으로 간다. 계단을 따라 언덕 위로 올라가니 호수가 넓게 펼쳐지고 수천 마리의 새가 날아다닌다. 모두 가마우지다. 동그랗게 알처럼 생긴 바위를 집 삼아 앉았다가 비상하기를 반복한다. 사람이 모이면 움직였다가 주위가 조용하면 모두 제자리를 잡는다. 보금자리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며 언제 먹이를 잡으러 갈지 생각하는 듯하다. 자극하지 않으면 한꺼번에 날지 않겠지? 군무를 보고 싶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새는 여행객의 바람을 들어줄 생각이 없는 듯하다.
단도에서 시계방향으로 3시간을 달리니 초원이 나타난다. 청해호 동쪽에 위치한 금은탄(金銀灘)이다. 한여름이면 금로매(金露梅)와 은로매(銀露梅)가 함께 피는 초원이라고 한다. 장미과에 속하는 식물로 한국에서는 물싸리라고 한다. 노란 꽃과 흰 꽃이 함께 피면 장관이긴 하겠다. 2010년 허베이성 만청(?城)의 금은화(金銀花) 재배단지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고 김대중 대통령을 상징하는 인동이 금은화다. 노란색과 흰색이 어떻게 함께 자라는지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금빛 은빛으로 물드는 초원이니 볼만하겠다. 승마, 사격, 풀밭썰매 등을 즐기는 사람이 많다.
서쪽은 청해호이고 나머지 삼면은 고산으로 둘러싸였다. 중국 정부는 천혜의 조건이라 판단했다. 1964년 이곳에서 중국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을 성공시켰다. 3년 후에는 수소폭탄 실험도 했다. 그래서 금은탄이자 원자성(原子城)이라 부른다. 평화로운 초원과 대량 살상용 폭탄,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갑자기 원자탄과 수소탄을 금과 은으로 포장했을지 모른다는 착각이 든다. 이 불순한 화학원소를 모두 청해호의 주기율표에서 삭제하고 싶어진다. 기분 좋게 청해호를 일주하다가 마주한 뜻밖의 불편함이다. 그저 영원히 아름다운 호수와 초원으로만 남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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