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는 법
편집자주
독창적 문체로 남성 패션지 ‘GQ’를 18년간 이끌어온 이충걸 전 GQ 편집장이 문화 현상의 이면을 새롭게 들춰 봅니다. 현재 서울 필동에 사는 이 전 편집장의 ‘멘션(mentionㆍ촌평)’은 격주 수요일자 <한국일보> 에 실립니다 한국일보>
언제부턴가 소속감이 하나의 화두가 되었다. 내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조금 혼란스러웠다. 성숙과 미성숙의 어느 단계에 속하는지, 프로와 아마추어 중 어떤 군에 속하는지, 세대와 세대 사이 어디쯤에 속하는지. 그러나 공기는 움직이지 않는다. 얼핏 자유롭고, 매일 많이 웃고, 수시로 허세가 차오를 때도 불편한 생각이 든다. 내가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다른 사람도 겪었을까? 세상은 배웠던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알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어느 호젓한 토요일 아침, 서재에 앉으니 초원의 가장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상수리 나무의 도토리도, 소박하게 한 자리 차지하던 곰팡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공원 저쪽에서 그 노래가 들렸다. 공연 스타디움 저리 가라 할 음량으로. “야 야 야 내 나이가 어때서…".
아무리 양질의 유행가라도 조용한 순간을 방해할 때는 세상에서 가장 서글프게 들렸다. 내 나이가 어때서? 라면서 숫양처럼 들이받는 저돌성,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라면서 헐거운 살갗으로 육박해오는 육체성….
나는 세상 한복판에서 들려오는 어떤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아서 책을 들고 옆집 카페로 갔다. 커피 잔을 들고 각자 번잡한 청년 일행과 떨어져 앉아 책을 폈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쳐 마음의 평화를 찾으라고 조르는 소설을 읽고, 나와 인물의 유사성을 낭만적으로 과장하는 마음에는 시효가 있었다.
5분 후 ‘1812년 서곡’이 검은 백팩에서 들렸다. 곧 ‘위 아 영’이 누군가 벗어둔 이어폰을 뚫고 나왔다. 조금 후에는 바흐가 나의 방어벽에 슬쩍 발을 들이밀었다. 어떨 때는 인생 전체가 화로 가득한 서랍장 같았다. 이리저리 걷어차인 플라스틱 여행 가방을 배고 자는 기분. 발코니로 나가자 미련이 남은 국악 가락이 여전히 공원 사이로 넘실거렸다. 장르가 다른 곡들의 파장과 진동 사이에서 쓰라린 가방을 쌀 때 고맙게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오래된 고독만큼 반갑지 않은 것도 없다. 어떤 사람은 고독 때문에 죽는다. 그러나 혼자 보내는 시간은 사회적 일탈이 아니라 시절의 불가피한 결과물. 원하든 원하지 않든 늘어난 수명이라는 트렌드는 서로 공명하며 문화의 윤곽을 만든다.
도시는 자주적인 사람들의 입맛을 맞추느라 분주하고, 커뮤니케이션 혁명은 사회와 고립 사이의 벽을 허물었지만, 어떨 때는 나에게 너무 관심을 갖는 타인도 내 자신만큼이나 힘들다. 사랑이 많은 사람들은 커피 탁자를 몇 년 동안 내려다보며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을 자기 삶 속으로 데리고 가려 하니까. 그러나 그런 경향이야말로 지금 문화가 만드는 공동의 이상과 가까울 것이다.
예전의 삶은 흔히 지루하게 묘사되었다. 벌 받는 것 같은 출퇴근, 영혼 없는 일, 가기 싫은 술자리. 그러니까 사회 속에서 존재감을 갖기 위해선 지루한 일들을 견뎌야 했다. 늘 그리운 디자이너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우리 지루한 사람은 되지 말자.”
그러나 일상의 지루한 리스트는 나열할 수조차 없다. 코미디언도 지루하고, 국회의원도 지루하고, 교수도 지루하다. 의사도 아픈 사람도, 매력적인 아주머니도 매력이라곤 한 톨도 없는 아저씨도 지루하다.
그렇다면 공중 앞에선 말도 못 꺼낼 사소함을 실어나르는 사람들, 매일매일 아침에 먹은 것과 저녁에 먹은 것을 올리는 사람들은 이런 사인을 보내는 게 틀림없다. “나는 네가 지루하지 않도록 엄청 노력할게. 대신 너도 나를 지루하게 만들지 마.” 그리고 친구와 안 친한 사람,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모두를 지루하게 내버려두지 않으려고 지루한 부분을 편집한다.
그렇게 다들 모든 것이 모든 사람에게 노출되는 유리의 집에 살게 되었다(집에는 벽이라도 있지). 정확하게는 유리로 된 현미경용 슬라이드 위에. 결국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관점을 강요하는 투명한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는 각자의 숙제가 되었다.
침묵을 혐오하는 전자 무대는 자꾸 자꾸 코멘트와 포스팅을 원한다. 소홀하면 곧 한쪽으로 치워져 투명 인간이 된다. 그야말로 사이버 나르시시즘의 새로운 물결이자 완전히 작위적인 미학의 순진함이며 미래 낭만주의의 이자이다. “이렇게 매력적인 이런 나 어때?” 현상! 그렇다면 이 지루한 세상에 나도 거짓말쟁이, 알코올 중독자, 살인자, 아니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아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겠지만.
그 결과로 다들 자기가 만든 리얼리티 쇼의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모두가 그러니까. 이때 내가 너무 흥미로운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는 사실은 어쩐지 마음이 놓인다. 나는 내면의 지루함과 접촉하면 되니까. 동시에 당신 내면의 지루함을 엿보면 되니까.
최신의 테크놀로지 역사는 일과 삶의 경계가 휴대폰이 만든 다리로 이어질 거라더니, 결국 우리에게 봉사해야 할 물건이 우리의 주인이 되고 말았다. 한 친구는 휴대폰이 세 개나 있는데, 이 전화기로 통화하는 동안 저 전화기로 이메일을 확인한다. 마지막 하나는 모든 전화가 불통일 때를 대비해 차에 두었다. 그는 마트에서 쇼핑 카트를 끌고 다니면서도 휴대폰으로 계약 하나를 끝냈다고 자랑해서 나의 분노를 샀지만, 그런 사람은 필시 하늘이 내리는 거라서 시기하지 않았다.
휴대폰 저글링은 다른 사람들도 능통했다. 어느 레스토랑에선 점심 테이블에 앉은 네 명이 동시에 각각 통화하고 있었다. 모두가 태연한 얼굴. 그 옆 테이블에 앉은 남성도 음식을 먹는 내내 전화를 했다. 통화가 끝나자 앞자리 여성이 휴대폰 좀 보자고 했다. 나는 그녀가 휴대폰을 물컵에 넣거나 밟아 버리길 바랐다. 그럼 얼마나 절묘한 응대가 될까. 그녀는 판결을 내렸다. “앞으로 나 대신 휴대폰이랑 먹어. 나 빼고 영원히.”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 전화는 불확실한 의사소통에 대해 새삼 일깨워 주었다. 받을 수도 있고 못 받을 수도 있는 소식의 불규칙함을. 위태로운 네모 박스 벽에 걸린 메시지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사람들은 집 전화기로는 꿈도 못 꿀 일을 휴대폰으로 다 한다. 강박은 더 심해지고(신호음이 들린다고 당연히 받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 에티켓은 더욱 느슨해져도(얼굴을 기우뚱, 어깻죽지로 받친 채로도 오줌을 싸니까), 통화 규칙을 강조하려는 시도는 비참하게 끝난다(어떨 때는 내가 제일 심하니까).
게다가 영화 볼 때도 응급 상황을 대비해 휴대폰을 켜둔다. 잘 때도 절대, 절대 끄지 않는다. 그 사람이 언제 연락할지 몰라서. 그러나 그런 전화는 걸려오지 않고 휴대 기기나 보험, 부동산 호객 전화나 물러 터지도록 받는다. 나는 인생의 우선순위가 된 ‘중요한 전화’의 정확한 의미가 너무 궁금하다. 그 창의적인 정의가 뭔지.
내 마음은 이제 그만 친구를 만들라고 경고한다. 누군가의 주소록에 내 이름을 보태는 것이 휴식을 주지 않는다고. 친구가 된 낯선 사람이 손짓할 때 그를 알아보지도 못할 거라고. 나의 초보적인 호기심은 이것이다. 사람들은 군중 속에 있으면 짜증난다면서 왜 혼자를 못 견딜까? 결국 양손에 다 쥘 순 없는 걸까?
예술가들은 고독할 필요와, 그 필요가 만들 삶의 방식을 기억한다. 그렇지만 우리 같은 사람도 혼자 보내는 일정량의 시간이 필요하다. 크고 작은 일 속에서 자기를 보호하는 문제, 그때그때 필요한 경계심, 종종 표면으로 끓어오르는 페이소스가 따르긴 해도. 그렇지만 금욕적인 이들이 같이 모여 있는 유럽의 수도원을 보면 끝까지 혼자 지내기란 정말 어렵구나 싶다. 그들은 하늘의 은총과 성직자의 계율, 영적 본성에 대한 사색으로 같이 어울렸으니까.
현대적인 고독은 너무 떠들썩해졌다. 그러나 혼자가 편한 사람은 서로에게 부드러운 기술을 요구하는 세태의 외래종도, 개별적 존재의 희생자도 아니다. 다만 스스로를 통제하는 권리를 가진 사람일 뿐. 당황스러운 건 혼자 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혼자가 아닌 시간이다. 자기만의 경험으로 나를 고쳐주려는 사람들과 잡동사니 정보의 참호에서 빠져나온 토요일 아침에는 저녁에 친구를 만나는 시간 사이를 채워야 한다. 무엇을 하든 그 시간은 나만의 것. 입을 닫으면 타인이 나에 대해 말해주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알게 될 것이다.
어느 밤, 동네 밖에서 친구들과 마시다가 집에 들어오면 처음 본 것 같은 적막이 채워져 있다. 그러면 다시 전화 걸고 싶은 충동이 치솟지만 꾹 참는다. 오래된 고독만큼 반갑지 않은 것도 없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혼자 있는 시간은 나를 돌보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것을. 실용적인 자립심은 오히려 나를 사회적 인간으로 만든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비밀의 무게는 늦은 잠, 혼자 마시는 맥주 한 잔만 못하다는 것을.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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