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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의 품격, 자손의 품위

입력
2020.08.24 06: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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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웅 광복회장이 15일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하고 있다. 뉴시스

김원웅 광복회장이 15일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하고 있다. 뉴시스


돈이 자본의 전부는 아니다. 학벌과 학식, 문화적 소양으로 축적되는 문화자본, 교우관계와 연줄로 구성된 사회자본, 좋은 평판과 사람들로부터 받는 존경으로 이루어진 상징자본도 있다. 경제적 자본을 후세대에 물려주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다른 자본을 얼마나 어떻게 물려줄 수 있는지는 문화에 따라 다르다. 한국처럼 개인을 평가하는 데 가족 배경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상징자본'도 쉽게 상속된다. 조상이 좋은 일을 하면 그 덕을 자손이 누린다.

우리나라에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는 상징자본 중 으뜸은 독립유공자 후손이 누리는 사회적 인정이 아닌가 싶다. 독립유공자를 조상으로 둔 덕분에 나는 많은 상징자본을 누리고 있다. 페이스북에 조상의 이야기를 올리면 많은 사람이 '좋아요'를 달아준다. 그러나 독립유공자의 후손이 모두 그렇게 복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듯이 아직도 많은 순국선열, 애국지사의 유족은 생활고를 겪는다. 내 가친의 회고록 '숲은 고요하지 않다'(이종찬 저, 2015)에는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을 때 일본군 출신의 면접관으로부터 “소위 독립운동한 집안인가?”라는 경멸조의 질문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1950년대, 군경 등 일제 잔재가 남아 있던 권력기관 종사자들에게 독립운동은 불편한 역사였다. 그런 일이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이 1948년에야 탄생한 신생국이라면서 정부수립일을 건국절이라 명명하려는 시도가 있다. 독립유공자 유족단체인 광복회는 이를 강력히 성토했다. 일제 통치를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항일운동을 폄훼하며, 일제의 탄압기구에 복무하면서 동족을 괴롭힌 사람들마저 건국의 주역으로 추앙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건국절 망동은 촛불에 의해 좌절되었으나 역사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이제 역으로 광복회가 나서서 국립현충원으로부터 친일 인사의 묘를 파내고 친일 발언을 처벌하는 입법을 하라고 소리친다. 광복절 광화문에 일장기가 펄럭이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광복회원들의 분노에 공감을 느낀다. 그렇지만 역사전쟁의 한복판에 선 광복회를 보면 위태로운 마음 또한 금할 수 없다.

국가는 요건을 정해 독립유공자 후손을 경제적으로 지원한다. 조상의 애국으로 인해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의 불리함을 보정하기 위한 적극적 우대 조치이다. 또 독립유공자의 업적을 선양함으로써 유족의 상징자본을 공인해 준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중국이나 북한처럼 혁명 유족이라 해서 더 큰 발언권과 권력을 누리게 하지는 않는다. 민주공화국의 원리에 합당한 처우이다.

지금의 광복회원 대부분은 독립운동의 현장을 본 적이 없다. 단지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역사적 사건을 평가하는 데 일반인보다 더 큰 발언권을 주장할 근거는 없다. 매국을 단죄한다는 명분으로 표현의 자유 등 타인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데 앞장선다면 조상의 항일 투쟁이 가지는 의미를 몰각할 수도 있다. 항일전은 전체주의 추축국을 상대로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선대가 축적한 경제적 자본을 잘못된 씀씀이로 탕진하는 재벌 3세처럼, 시대의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언동으로 조상이 목숨을 던져 쌓은 상징자본을 망실할 수도 있다. 조상을 받들기 위해서는 그분들이 활동한 역사의 공간이 얼마나 평가하기 어려운 복잡한 사건들로 가득 차 있었는지를 겸허하게 공부해야 한다. 조상의 품격은 자손의 품위에도 좌우된다.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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