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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가 왕이 되기 전… ‘엑스칼리버’의 주인은 여성이었다

입력
2020.08.22 04:4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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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넷플릭스 '저주받은 소녀'

편집자주

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칼럼니스트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 연재됩니다.

'저주받은 소녀'는 아서왕 전설을 그린 판타지 드라마다. 아서왕 이전에 엑스칼리버의 주인이었던 여왕 니무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넷플릭스 제공

'저주받은 소녀'는 아서왕 전설을 그린 판타지 드라마다. 아서왕 이전에 엑스칼리버의 주인이었던 여왕 니무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넷플릭스 제공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를 처음 본 것은 아동문학전집에 포함된 책이었다. 아서왕, 엑스칼리버, 마법사 멀린, 카멜롯, 랜슬로트와 퍼시발 등을 알게 됐다. 그리고 ‘아이디어회관 SF세계명작’에 포함된 마크 트웨인의 '아서왕 궁정의 코네티컷 양키'를 '아서왕을 만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읽었다. 19세기의 기술자가 6세기 아서왕이 다스리는 카멜롯으로 타임슬립하여 벌어지는 모험 이야기다. 이성과 합리주의로 무장된 근대의 작가가 쓴 SF라 마법사 멀린이 야비한 사기꾼으로 묘사된다. 원리를 모르는 이에게 새로운 과학은 마법과 같아 보이기에 19세기의 기술자는 6세기의 마법사 멀린을 압도한다.

아서왕의 이야기는 흥미로웠지만, '아서왕을 만난 사람'이 훨씬 재미있었다. 아동용으로 각색된 책으로 만난 아서왕 이야기는 일반적인 영웅담이었다. 신검을 받은 영웅이 적을 물리친 후 태평성대를 이뤘다는 것. 이후의 곤란한 일들이 있기는 하지만 인상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서왕 이야기의 아동 버전만을 보았기 때문임을 곧 알게 됐다. 존 부어맨 감독의 영화 '엑스칼리버'(1981)에 충격을 받으며 빠져들었다.

'엑스칼리버'를 보고서야 아서왕 전설이 왜 중세 영웅담의 전형이 됐는지 알 수 있었다. 영웅의 고난과 성장을 기본으로 치열한 권력 투쟁과 음모와 질투, 진기한 전설과 마법, 선연한 성과 폭력까지 모든 것이 다 있었다. 총애하는 기사 랜슬롯이 아서왕의 부인 기네비어와 부정을 저지르고 떠났다가 돌아오고, 아서왕의 조카이며 아들이기도 한 모드레드의 반란으로 최후의 전투가 벌어지는 등 '엑스칼리버'의 장면들은 이전에 알던 아서왕 이야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게다가 존 부어맨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영화답게 모든 장면들이 가슴 저리게 강렬했다.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브라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원탁의 기사들이 꽃잎이 흩날리는 숲을 말 타고 질주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했다.

'엑스칼리버' 이후 아서왕에게 흥미가 생겼다. 아서왕의 일대기는 전설로 시작돼 '브리튼의 역사' '캄브리아 편년사'에 등장한다. '브리타니아 열왕사' 이후 중세가 되면 아서왕의 이야기를 다룬 책들이 많이 등장한다. 토마스 말로리의 '아서왕의 죽음'이 가장 충실한 것으로 평가된다. 아서왕이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5, 6세기에 실존한 브리튼족의 전쟁영웅 등 여러 인물에서 따와 만들어진 허구라고 보는 입장이 다수다. 영화 '킹 아서'(2004)에서 묘사된 것처럼 로마에서 파견된 장군이라고 보는 입장도 있다. 브리튼족이 포함된 켈트족의 신화에서 유래한 인물이라고 보기도 한다. 현대에 쓰인 아서왕을 다룬 책으로는 장 마르칼의 '아발론 연대기'와 버나드 콘웰의 '아서왕 연대기'가 있다.

니무에는 아서왕에게 엑스칼리버를 건네 준 호수의 여인으로, 판본마다 설정이 다르지만 물과 관련이 있는 켈트 신화의 치유와 생명의 여인으로 많이 묘사됐다. 넷플릭스 제공

니무에는 아서왕에게 엑스칼리버를 건네 준 호수의 여인으로, 판본마다 설정이 다르지만 물과 관련이 있는 켈트 신화의 치유와 생명의 여인으로 많이 묘사됐다. 넷플릭스 제공


이번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저주받은 소녀'는 아서왕의 전사(前事)를 그린 판타지 드라마다. 토마스 휠러가 쓰고, 프랭크 밀러가 그린 일러스트레이티드 소설이 원작이다. 토마스 휠러는 드라마 '엠파이어', 애니메이션 '장화신은 고양이'와 '레고 닌자고'의 스토리와 시나리오를 썼다. 프랭크 밀러는 미국 코믹스의 역사를 바꾼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앨런 무어의 '워치맨'(1986)과 함께 프랭크 밀러의 ‘다크 나이트 리턴즈’(1986)는 코믹스 장르를 한 차원 끌어올린 걸작이며 이후 코믹스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만화는 아이들의 오락에서 어른들도 빠져드는 예술로서 인정받게 됐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 ‘배트맨:이어 원’ ‘씬 시티’ ‘300’ ‘데어데블: 본 어게인’ 등이 밀러의 대표작이다.

‘저주받은 소녀’가 프랭크 밀러 원작이란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는 약간 의아했다. 프랭크 밀러의 작품은 대단히 남성적이고, 거칠고, 폭력적이다. 완전 마초 스타일이라고 할 정도다. 그런데 여성이 주인공인 아서왕의 전설을 그린 작품이라니. 원작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니 프랭크 밀러가 스토리를 쓴 것은 아니었다. 프랭크 밀러가 어느 정도 영향을 줬을 수는 있겠지만, 원작 소설을 쓴 건 토마스 휠러다.

‘저주받은 소녀’는 아서왕 이전에 엑스칼리버의 주인이었던 여왕이 니무에라고 말한다. 니무에는 ‘호수의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엑스칼리버를 건네 준 호수의 여인이며, 아서왕이 죽음을 앞두고 아발론으로 떠날 때 함께 한 세 여인 중 하나. 판본마다 설정이 달라지지만 물과 관련이 있는 켈트 신화의 치유와 생명의 여인으로 많이 묘사됐다. 마법사 멀린의 연인이나 제자로도 나온다. ‘저주받은 소녀’의 니무에는 페이족이다. 페이족은 인간과 똑같이 생긴 종족부터 머리에 뿔이 달리거나 특이한 외형을 가진 종까지 다양하게 존재한다. 한때 인간과 함께 지구에 존재했지만 언젠가부터 사라진 혹은 멸종당한 존재들이 페이족이다.

마법과 초자연적인 설정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아서왕 이야기는 완벽한 판타지의 세계가 아니었다. 고대의 신화와 전설에 중세 기사 영웅담 등을 마구 섞은 이야기다. 그러나 현대 판타지인 ‘저주받은 소녀’는 인간과 다른 존재들이 공존했던 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광신도 집단인 레드 팔라딘은 교황의 지시를 받아 페이족을 학살하기 시작한다. 다른 신을 섬기고, 인간과 다른 외양인 존재들을 말살시키려는 것이다.

니무에는 어릴 때부터 특별한 능력이 있어 부족 내에서도 따돌림을 받는다. 우리와 다른 존재는 언제나 위협적이라고 생각하니까. 레드 팔라딘의 공격을 받은 어머니는 죽기 전에 니무에에게 엑스칼리버를 건네준다. 반드시 마법사 멀린에게 줘야 한다면서. 브리튼의 왕 우서 펜드래곤의 참모로 있던 멀린은 엑스칼리버가 살육을 불러온다며 없애버릴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페이족이 말살당할 위기에 놓이면서 혼란에 빠진다.

에피소드가 진행되면서 니무에가 만나는 이들의 이름을 들으면, 이미 알고 있는 그들이 연결된다. 아서, 우서 펜드래곤, 이그레인, 가웨인 그리고 1시즌 마지막에야 이름이 나오는 퍼시발과 랜슬롯 등. 아서는 몰락한 기사의 아들이며, 빚 때문에 야비한 도둑질까지 하는 초라한 인물이다. 그리고 흑인. 처음 아서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니무에가 아무리 주인공이어도 아서가 이리 초라해도 되는 것인가 생각했다. 다행히 뒤로 갈수록 아서는 정신을 차리고, 명예를 위해 싸우는 인물로 성장한다. 좋은 리더십도 보여준다. 초반에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캐릭터가 고난이나 혼돈을 겪고 난 후 본명이 드러날 때 ‘그렇지’라는 생각이 든다. ‘원탁의 기사’ 주요 인물들이 등장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이렇듯 ‘저주받은 소녀’가 익히 잘 알려진 캐릭터들을 어떻게 활용하며 ‘전설’을 재구성할 것인지 궁금해 하며 보게 된다.

'저주받은 소녀’의 서사는 여성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니무에가 있고, 어릴 때부터 절친인 핌과 아서의 여동생인 이그레인, 해적 두목인 레드 스피어 등이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 넷플릭스 제공

'저주받은 소녀’의 서사는 여성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니무에가 있고, 어릴 때부터 절친인 핌과 아서의 여동생인 이그레인, 해적 두목인 레드 스피어 등이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 넷플릭스 제공


‘저주받은 소녀’의 주인공은 니무에다. 그가 누구이고, 어떻게 성장해 가는가에 주목하게 된다. 영웅담이 흔히 그렇듯이 자기부정에서 출발한다. 어릴 때부터 따돌림을 받았던 니무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믿지 않는다. 하고 싶지도 않다. 부족의 치유자도, 페이족의 여왕도 니무에는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는 힘이 있다. 엑스칼리버를 들고 도망을 치다가 늑대 떼에게 위협을 받으면서 비로소 니무에는 강력한 힘을 보여준다. 싸워서 이기고, 증명해야 할 순간은 결국 오고야 만다. 결정적 순간의 선택이 그를, 승자로 만든다. 승리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영웅담은 결국 승자의 서사시로 정리돼야 하니까. 또한 ‘저주받은 소녀’의 서사는 여성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니무에가 있고, 어릴 때부터 절친인 핌과 아서의 여동생인 이그레인, 해적 두목인 레드 스피어 등이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장 인기가 좋았던 판타지 ‘왕좌의 게임’의 매력은 치열한 암투였다. 서로 이기기 위해, 권력을 위해 타협하고, 연합하고, 배신하고, 짓밟는데 그 와중에 수많은 사람이 죽는다. 아무리 머리가 뛰어나고, 힘이 세고, 모사꾼이어도 상관없다. 함정에 빠지기도 하고, 단순한 실수이기도 하고, 그저 힘이 모자라 죽기도 한다. 조지 R.R. 마틴이 역사 마니아이고, 장미전쟁 등에 심취한 덕에 ‘왕좌의 게임’의 생생한 권력 투쟁이 탄생했다고 한다. 인간의 역사는 웬만한 픽션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뒤죽박죽이고 잔혹하다. ‘저주받은 소녀’가 마스터피스는 아니지만 펜드래곤과 레드 팔라딘, 니무에를 둘러싼 치열한 분쟁과 음모도 꽤 흥미진진하다. 느리게 진행되지만 후반으로 가면 충분히 시선을 사로잡는다.

‘저주받은 소녀’의 아쉬움은 이제 중요한 순간인데 1시즌이 끝난다는 것이다. 큰 이야기로 설정된 드라마의 최근 경향은 1시즌에서 인물의 배경과 성장을 어느 정도 보여주면서 확장되고, 흥미로워지는 순간에 시즌을 끝낸다. 2시즌을 기대하게 만들어 제작비를 받으려는 속셈인 것은 알겠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약간 맥 빠지기도 한다. ‘저주받은 소녀’도 더욱 재미있어지는 순간에서 끝나버리니, 다음을 안 볼 수가 없다.


김봉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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