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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공공기관

입력
2020.08.18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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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조명래 환경부 장관이 16일 오전 구례5일장 시장을 방문한 가운데 성난 상인들이 조 장관이 앉아있던 책상과 의자를 발로 차고 있다. 뉴스1

조명래 환경부 장관이 16일 오전 구례5일장 시장을 방문한 가운데 성난 상인들이 조 장관이 앉아있던 책상과 의자를 발로 차고 있다. 뉴스1


조명래 환경부 장관이 16일 전남 구례를 찾았다가 봉변을 당했다. 전남 구례는 섬진강댐의 갑작스러운 방류로 하류 남원의 섬진강 둑이 터지면서 최악의 수해를 입은 곳 중 한 곳이다. 정부 차원 조치에 앞서 장관이 이 지역 상인과 주민들로터 피해 상황을 보고받고 의견을 청취하기 위해 마련된 간담회였다. 하지만 조 장관이 앉아 있던 테이블은 간담회 시작 10분도 채 안 돼 주민 손에 뒤집혔고 의자는 주민 흙발에 차였다. 거친 행동으로 표출된 지역 주민들의 분노는 ‘이번 참사는 인재(人災)’라는 것으로 압축된다.

인재 정황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전북 진안 용담댐의 경우 5일부터 호우주의보가 발령됐는데, 7일 저수율이 97.7%에 달했다. 용담댐 수위는 7일 오후 1시 262.7m,에서 오후 4시 263.5m로 상승하는 등 계획홍수위(홍수조절을 위해 댐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 수위) 265.5m에 빠른 속도로 근접했지만, 이상하게도 용담댐은 방류량을 크게 늘리지 않았다. 허겁지겁 수문을 올린 건 이튿날인 8일 댐 인근에 최고 400㎜가 넘는 폭우로 유입량이 급증하면서였다. 방류량은 초당 2,700톤으로 그 이전과 비교하면 10배 수준에 달한다. 사달 직전까지 만수위를 유지한 결과다. 이로 인해 충남 금산과 충북 영동, 옥천, 전북 무주 등 4개 군에서 주택 220가구와 농경지 670㏊가 물에 잠겼다. 인삼 주 재배지인 금산 지역 한 군데에서만 200㏊의 인삼밭이 물에 잠겼다.

홍수뿐만 아니라 가뭄에도 대비해야 하는 다목적댐의 특성을 감안하면 수자원공사는 수위를 높게 유지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항변할 수 있다. 또 비록 틀리기는 했지만 기상청의 장마 종료 예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 만큼 모든 화살이 그들에게 날아드는 상황이 못마땅하고 억울할 수도 있다. 사람이 하는 일인 만큼 실수 역시 있을 수 있다. 수공이 댐 하류 지역에 ‘고의’로 피해를 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국민이 진짜 열 받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신의 직장’이라는 공공기관에 몸 담은 이들- 결국엔 혈세를 받아먹고 사는 그들-이 왜 좀 더 적극적으로 사전 방류 조치에 나서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수공은 “가이드라인에 따라 업무를 했다”는 입장이지만, “방류량을 늘리지 말라는 민원이 있었다”고 실토한 대목에서는 아쉬움을 넘어 분노를 느끼는 국민이 적지 않다. 사전에 방류량을 늘렸더니 하류 식당과 펜션, 래프팅 업체에서 휴가철 성수기에 손님을 못 받는다는 민원 탓에 사전 방류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사전 방류 필요성은 있었지만, 민원 탓에 결행하기가 어려웠다’는 얘기가 된다. 구더기 무서워 한 해 장을 못 담갔다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정부(인사혁신처)는 지난달 말 국가공무원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 했다. 징계가 두려워 복지부동하는 공무원들이 자기 생각에 따라 사안을 적극적으로 해석, 행정을 펼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한 ‘적극행정 공무원 우대 및 징계면제’ 조항 신설이 핵심이다. 환경부 통제를 받는 수자원공사는 공공기관이라 이 법 적용을 받지 않지만, 일반 국민들이 보기엔 그 직원들도 광의의 공무원이다. 적극행정 공무원에게 상주는 법도 필요한데, 이번 사태를 겪으며 그 반대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소극행정 공무원과 조직에 징계를 할 수 있는 조치 같은 것이 절실하다는 얘기다. 구더기 때문에 장 못 담근다는 종업원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사장님'은 없다.

정민승 지역사회부 차장


정민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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